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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175

할머니의 먼 집(2015) : 내 영혼의 휴식처 영화가 시작된지 5분쯤 지났을까. 갑자기 울컥한다. 딱봐도 재미있는 영화는 아니다. 연기파 배우들이 그려내는 감동 스토리도 아니다. 보나마나 지루한 다큐영화일 것이다. 그런데 감정이 크게 동한다. 영화를 본 것이 아니라 나를 보았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것은 나를 읽는 것이다. 영화를 보는 것은 나를 보는 것이다. 언젠가부터 감정이 코너에 몰리고, 스트레스 수치가 감당 못할 수준이 될 때면, 갑자기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이 나곤 했다. 서로 용돈 주려하고, 서로 안 받으려하고, 몰래 가방에 숨겨 넣어주고.. 어릴적 잠든 내 손등을 쓰다듬던 까슬까슬한 할머니의 손. 자고 있지 않았으나, 그 느낌이 좋아 자는 척 했던 기억... 할머니와 손주 사이의 감정은 대체로 단순하다. 책임과 의무가 별로 얽혀있지 않기 .. 2017. 2. 15.
블랙 스완(2010) : 점프! 점프! "어젯밤 꿈을 꾸었어요" 니나는 자기 일을 잘하고, 열심히 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잘하는 게 다가 아니다. 그 이상이어야 한다. 그 이상이길 꿈꾼다. 그녀 안에서 자라나는 꿈. 무대의 주인공, 독보적인 존재.. 그 꿈이 그녀를 터치했다. 마법을 걸었다. 아니, 저주를 걸었다. 꿈은 실현될 때까지 인간을 들볶고 괴롭히는 저주다. 빼앗아라 니나가 원하는 자리는 단원 모두가 원하는 자리다. 동료들과의 경쟁, 질투, 시기심, 미움.. 이런 피곤한 감정들을 끊임없이 마주해야 한다. 무엇보다 현재의 스완퀸 베쓰를 밀어내야 한다. 그렇게해서 저 자리를 차지한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니나 역시 베쓰처럼 비참하게 밀려나야 한다. 언젠가는 겪어야 할 그 미래를 생각하면, 공포스럽다. 두렵다. 하지만 꿈을 꾸기 시작한 이상, .. 2017. 1. 11.
춘몽(2016) : 액자 속의 그녀, 거울 속의 그녀 영화를 보면서 막심 고리키의 소설 가 떠올랐다. 뭐 비슷한 걸 말하지 싶었다. 회색빛 공장에서 회색빛 삶을 살아가는 노동자들은 한 소녀를 사랑한다. 그 소녀가 특출나서도, 좋은 사람이어서도 아니다. 그 자리에, 그 순간에, 그녀 아닌 다른 여자가 있었다면, 그들은 그 다른 여자를 사랑했을 것이다. 눅눅한 삶을 살아가는 그들은 사랑을 받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아닌, 사랑을 "주고" 싶다. 그저 사랑을 주고 싶다. 그 누가 되었든.. 누군가에게 사랑을 준다는 것. 그들의 회색빛 인생에 생기를 불러일으키는 일이다. 그렇게라도 해야 그 삶을 견딜 수 있으니까. 춘몽도 이런 비슷한 이야기를 하겠거니하고 맥놓고 보고 있었다. 근데 뭔가. 이 자다가 봉창뚜드리는 결말은?? 화면이 칼라로 바뀌면서 휠체어를 탄.. 2016. 12. 17.
비밀은 없다(2016) - 21세기에 다시 쓰는 아가멤논 그리스군 총사령관 아가멤논의 군대는 여신의 분노로 인해 바람이 불지 않아 트로이로의 출정을 못하고 있다. 여기에 전염병까지 번지면서 진영은 어수선해지고, 아가멤논의 리더쉽은 의심받는다. 하여 아가멤논은 딸과 아내를 속여 진영으로 데려와 딸을 희생 제물로 삼아, 여신의 분노를 가라앉히고, 부하들의 신임을 얻어 출항한다. 이에 왕비인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치를 떨며 분노하고, 남편에 대한 복수심에 사로잡힌다. 근데 자기 딸을 희생삼아서까지 트로이로 전쟁을 하러가야만 하는 걸까? 그놈의 대의라는 건 얼마나 대단하단 말인가. 트로이와의 전쟁 명분은 트로이 왕자 파리스가 헬레나를 납치했다는 것이다. 이건 어거지다. 모두가 안다. 납치가 아니라, 헬레나와 파리스가 눈이 맞아 사랑의 도피를 했다는 걸 말이다. 그러니까 .. 2016. 10. 29.
킹스 스피치 (The King's Speech, 2010) 자기 목소리를 낸다는 것, 이것은 자기 생각과 감정을 타인에게 드러낸다는 것이다. 자신을 주장하는 것이다. 해서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 즉 자기를 표현하고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된 사람이다. 스스로를 확신하는 사람이다. 근데 이게 심각하게 지나친 사람도 있다. 자아 비대증에 걸린 미치광이 히틀러 같은 사람 말이다. 버트는 자신이 미치광이 말더듬이 왕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괴로워하지만, 그럴 일은 없다. 미치광이는 절대 말을 더듬지 않으니까. 그러니 자기 목소리를 내려면, 약간 미쳐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자기 안의 흥과 합일하든 치밀어오르는 분노에 휩싸이든 어쨌든 뭔가 정상적인 것을 좀 넘어서서 미친 듯이 떠들고 난 뒤, 정신을 차려보면, 어 내가 말을 이렇게 잘했나 싶은 경험들.. 2016. 10. 15.
쇼생크 탈출 (1994) : 나를 자유롭게 한 것은 나 자신이지 억울하다. 사는 게 억울하다. 누가 나한테 누명을 뒤집어씌운 것도 아니건만, 뭐가 그리도 억울한 걸까.. 현실에 발목 잡힌 삶. 일상의 굴레에 갇힌 삶. 누가 날 가둬둔 것도 아니건만, 삶은 왜 이리도 갑갑한 걸까.. 그래서 우리는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을 꿈꾸곤 한다. 어딘가 먼 곳으로 떠나보길 희망한다. 자유롭게 선을 가로질러 가보길 희망한다. 하지만 이곳을 벗어난다 한들 별수 있겠는가. 그나마 손에 쥐고 있는 것들이나마 지키는 게 낫지.. 우리는 금세 희망을 거두고, 현실의 감옥으로 복귀한다. "희망은 위험한 거야. 희망은 사람을 미치게 할 수 있어. 이 안에선 아무 쓸모가 없지.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게 좋아." 사람들은 말한다. 희망은 위험하다고. 희망은 고문이라고. 지옥에는 있는 것은 절망이 아니.. 2016. 10. 8.
가장 따뜻한 색 블루 (2013) "이번엔 머릿속으로 이렇게 되뇌어봐. '난 여자고'는 사실이다... 거기서부터 이야기는 네 것이고 사실인 거야" 미대생 언니와 사랑에 빠진 10대 소녀 이야기. 하지만 관객이 10대가 아니어도, 여자가 아니어도, 프랑스인이 아니어도, 아델이라는 인물과 이야기에 동참할 수 있다. 이것이 이야기의 힘이다. 성장하기 원하는 인간, 더이상 "작기" 를 거부하려는 인간, 뛰어넘으려는 인간. 이것은 비단 아델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의지고 희망이고 욕망이다. 하여 여기서부터 이야기는 관객의 것이 되고, 사실인 것이다. 이제 아델의 이야기, 아니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작다' '너무 작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작아선 알 될 상황이야.... 작기를 거부해야 하는데 그날이 목숨을 잃는 날이기도 하지." 아.. 2016. 9. 30.
셔터 아일랜드 (Shutter Island, 2010) : 내가 나를 속인다 우리 뇌의 제1 목표는 서바이벌이다. 살아남은 다음에야 정의든 윤리든 뭐가 되었든, 더 높은 단계의 욕망을 추구할 수 있다. 일단 살아남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뇌는 우리를 속인다. 고통스러운 기억은 왜곡하거나 지워버리고, 행복한 기억은 부풀려 놓는다. 그런데 이것조차도 작동이 안 되는 급박한 경우도 있다. 이땐 미쳐버린다. 미친다는 건 비상 착륙 장치 혹은 사이드 브레이크 같은 것이다. 제어가 안 되는 상황에서 박살나지 않고, 일단 살아남는 데 필요한 장치 말이다. 테디가 미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의 기억,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기억을 가진 그가 죽지 않고 살기 위해선 미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정신병원 의사는 이 기억을 악착같이 되돌려 놓으려 한다. 정신병을 치료.. 2016. 9. 24.
차이나타운(2014) : 흔들리는 딸들에게 "곱배기" 일영이는 보통 여자 애와 다르다. 성인 남자에게 붙잡힌 여자 아이라면 살려달라고 놓아달라고 울고불고 사정사정하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일영이는 탁이가 가방에 집어넣어와야 할 정도로 필사적으로 발버둥치고, 반항하고, 저항하고, 물어뜯는 아이다. 버려졌을 때도 일영이는 울지 않는다. 자리에 주저앉아 울고있는 쏭이는 보통 여자 아이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런데 일영이는 이런 쏭이를 찾아서 데려가기까지 한다. 마가흥업까지 돌아가는 길에 얼마나 쏭이가 속을 썩였을지는 안봐도 훤하다. 배고프다, 목 마르다, 다리 아프다, 하면서 얼마나 징징대고 주저앉으려 했을까. 일영이는 이런 애를 끌고 돌아왔다. 누군가를 이끌어 갈 자질을 타고난 아이인 것이다. 마가흥업에 도착한 직후의 모습은 더욱 인상적이다. 자.. 2016. 7. 9.
텔미썸씽 (1999) - 나를 욕망하느냐 욕망.. 그 악을 처단하러 왔노라 욕망은 집착이고, 폭력이다. 욕망과 폭력은 육체의 것이요, 피의 색깔이다. 사랑이라는 미명하게 벌어지는 갖가지 폭력들. 수연의 아버지는 수연을 욕망한다. 그녀의 아름다움을 탐하고, 집착하고, 폭력을 서슴치 않는다. 수연은(심은하) 경험으로 배웠다. 욕망은 폭력이오, 곧 악이라는 것을. 하여 그녀는 자신을 욕망하는 모든 자들 앞에 나타나 묻는다. '나를 욕망하느냐(너는 악인가)' .. 그들은 답했다. '너를 욕망한다.(나는 악이다)' .. 스스로 악이라고 고백한 그들이 죽어마땅한 이유다. 승민은(염정아) 수연을 악몽 속에서 구원해주고 싶다. 하지만 힘없는 소녀는 다른 힘없는 소녀를 구해주고 싶어도 구할 수 없다. 이런 자신의 무력함에 화가 났을 것이다. 그래서 성인이 된 .. 2016. 6.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