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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1

가장 따뜻한 색 블루 (2013)

by R.H. 2016. 9. 30.

 

 

<스포일러 주의>

 

 

"이번엔 머릿속으로 이렇게 되뇌어봐. '난 여자고'는 사실이다... 거기서부터 이야기는 네 것이고 사실인 거야"

 

미대생 언니와 사랑에 빠진 10대 소녀 이야기. 하지만 관객이 10대가 아니어도, 여자가 아니어도, 프랑스인이 아니어도, 아델이라는 인물과 이야기에 동참할 수 있다. 이것이 이야기의 힘이다. 성장하기 원하는 인간, 더이상 "작기" 를 거부하려는 인간, 뛰어넘으려는 인간. 이것은 비단 아델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의지고 희망이고 욕망이다. 하여 여기서부터 이야기는 관객의 것이 되고, 사실인 것이다. 이제 아델의 이야기, 아니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작다' '너무 작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작아선 알 될 상황이야.... 작기를 거부해야 하는데 그날이 목숨을 잃는 날이기도 하지."

 

 

 

 

 

아델은 책을 사랑한다. 정확히는 문학을 사랑한다. 선배 오빠와 첫 데이트 날 하는 얘기는 죄다 문학 이야기다. 이 선배는 아델의 관심사에 맞춰줘가며 이야기를 이어나가지만 열렬히 문학을 좋아하는 건 아니다. 선생님이 챕터별로 분석해주지 않았다면, 과제 소설조차 따라가기 어려웠을 거라고 고백한다. 

 

 

하지만 아델은 선생님이 작품을 지나치게 분석해주면, 상상의 여지가 없어서 짜증난다고 한다. 자기만의 시선, 자신만의 상상력으로 이야기를 재구성하고 해석하길 원한다는 것이다. 

 

 

책 이야기에 신나하며 눈 반짝이던 것과 달리, 선배와 영화을 보면서는 지루해하고, 섹스를 하면서는 허전해한다. 그리고는 친구에게 울며 하소연한다. 이 선배와의 관계에선 뭔가가 빠진 것 같다며, 자기가 이상한 년 같다고.. 도대체 무엇이 빠진 걸까..

 

 

'자기 방은 자기 머릿속' 이란 말이 있다. 아델의 방은 침구도, 벽지도 죄다 푸른색이다. 게다가 이 영화는 사랑을 이야기하는데, 파란색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색이란다. 들어본 적 없는 소리다. 사랑, 열정, 따뜻함을 상징하는 색은 빨강이라는 건 상식이다. 반대로 파랑은 이지적이고 차분한 색이다. 여기에서 바로 아델의 진짜 욕망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녀는 지적인 것, 이성적인 것에 갈증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에게서 나와 비슷한 점을 보려 하고 느끼려는 지점은 심리 성장에 반드시 필요하다."  -김현철, <어젯밤 꿈이 당신에게 말하는 것>

 

 

그래서 우연히 길에서 부딪힌 파란 머리 미대생 언니에게 넋이 나간다. 엠마는 자기만의 색깔을 가진 사람이다. 이미 자기 자신이 된 사람이다. 거침없이 자유로운 사람. 자기만의 세계를 그릴 수 있는 사람. 자신의 주위를 환상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이다. 아델은 단번에 이를 알아본다. 

 

 

엠마는 바로 아델 속에 숨겨진 동경이 형상화되어 나타난 존재인 것이다. 

 

 

아델은 노동자 가정의 자녀다. 그녀의 가정을 나타내는 장면들은 죄다 먹방이다. 여기서 가족들이 무엇을 보고, 무엇을 이야기하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오로지 먹는 것. 먹고 사는 것만 있는 곳. 대화가 전혀 없는 가정. 그렇다고 문제 있는 가정은 아니다. 먹고 사는 일상이 있는 곳. 편안한 곳이기도 하다.

 

 

엠마의 집을 다녀온 후, 집에 들어오는 아델의 표정은 어딘가 모르게 서글퍼보인다. 하지만 아델을 기다리는 깜짝 생일파티. 여기서 가족, 친구들과 어울리는 그녀의 모습에는 자연스러움과 편안함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 친구들은 그녀와 같은 노동자 계층의 가정인 듯 하다. 민영화 반대 노동자 행진에 함께 참가한 친구들이기도 하다. 아델이 민영화 반대 행진에 참가한 것은 정치적 신념이 있어서라기보단, 이것이 그녀의 실제 삶을 지배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또한 장래 희망이 교사라는 데서도 노동자 계층에 속한 아델의 불안을 엿볼 수 있다. 불확실한 상황에서 10년 넘게 무언가를 공부할 순 없다며, 뭔가 실질적인 것이 좋다고 말하는 아델이다. 그런데 교사가 진짜 아델의 희망 직업이기는 했을까. 자식에게 부모의 말은 예언이 된다. 밥상머리에서 끊임없이 안정적인 직업에 대한 탄식을 듣고 자란 아델의 불안이 만들어낸 장래 희망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삶이란 것이 먹고만 살면 그만인 게 아니다. 삶은 그 이상이어야 한다. 하여 그녀는 이런 일상을 벗어나고 싶다. 도약하고 싶다. 선을 넘고 싶다. 동시에 선 안에 머물고 싶기도 하다. 선 안의 편안함에 안주하고 싶다. 이렇게 상반된 양가 감정은 그녀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있다. 

 

 

그런데 엠마와 함께라면 선을 넘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실제로 엠마와 함께 살면서 아델은 엠마의 누드 모델이 된다. 아델 스스로 고백했듯이, 엠마의 작품이었기에 할 수 있었던 일이다. 엠마가 아니었다면, 아델이 자신을 그렇게 대담하게, 거리낌 없이 드러내지 못했을 것이다.

 

 

영화 후반부로 가면 엠마는 상당히 이기적으로 그려진다. 아델을 이해해주지 않고, 존중하지도 않는다. 이는 영화가 아델의 감정에 매우 집중하기 때문에, 엠마의 그것은 상당히 삭제해버렸기 때문이다. 아델과 함께한 시간동안 엠마의 피곤함은 무엇이었는지가 완전 배제되었다는 말이다. 해서 잠시 엠마의 감정을 따라가보자.

 

 

엠마는 아델을 사랑한다. 아델의 집에서 아델 아버지가 보여준 태도와 말은 엠마에겐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다. 예술하다가는 굶어죽는다느니, 남자친구는 있느냐느니.. 엠마는 이런 말들에 유하게 넘어간다. 아니, 거짓말을 한다. 엠마는 예술가다. 자신 자신을 표현하는 사람이다. 이런 그녀가 자신을 숨겼다는 건 자기 부정이고, 아델 아버지의 말들는 엠마 삶 전체에 대한 공격일 수 있지만, 참는다. 그만큼 아델에 대한 감정이 각별하기 때문이다. 

 

 

아델의 삶에 있어 엠마는 그냥 아는 언니, 그 뿐이고, 친구와 직장 동료들에게 엠마의 이름은 아예 존재조차 하지 않는 유령 같은 것이다. 반대로 엠마의 삶에서는 아델이 있는 그대로 살아있다. 엠마는 자신의 가족, 동료, 친구들에게 아델을 자신의 파트너로서 소개한다. 

 

 

이렇게 처음부터 삐걱거리는 가치관 차이에도 불구하고 엠마가 아델과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델에게서 분명 선을 넘고 싶어하는 욕망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술계의 거물인 조아킴이 아델의 "화폭 위에 존재하려는 욕망"을 단번에 포착해낸 것만 해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아델은 변하지 않는다. 아델 삶에서 엠마는 여전히 숨겨진 존재다. 또한, 엠마는 자신만이 아니라 자신과 삶을 함께하는 사람도 성장하길 바란다. 그래서 아델에게 글, 특히 세상에 내보일 글을 쓰길 격려한다. 하지만 아델은 이것을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인다. 이런 식이라면, 그들은 더이상 함께 나아갈 수 없다. 그들은 결국 파국에 이른다.

 

 

 

"바닷물에 가만 떠 있곤 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 그럼면 바다가 몸을 어루만져준다. 괜찮을 거라고, 어떻게든 다시 사는 방법이 있을 거라고,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바다에 닿을 거라고, 그럼에도 그 여자는 자꾸만 바닷속으로 가라앉는다. 그런 때면, 바다는 다시 은밀한 부력으로 그 여자를 밀어올린다. 떠오를 수 있다고. 누구나 자신이 가진 질량만틈 떠오를 수 있다고." -김형경<세월>

 

 

아델 삶에서 엠마라는 존재는 너무도 중요했다. 이미 떠나버린 엠마를 아델은 잊지 못한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엠마를 만나보지만, 아델을 향한 애틋한 마음은 영원할 것이지만, 이젠 더이상 아델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슬픈 말만 들을 뿐이다. 그럼에도 미련의 끈을 버리지 못한 아델은 엠마의 전시회를 방문한다. 

 

 

그런데 엠마는 아델을 불편해한다. '니가 여길 왜..' 라는 표정의 엠마. 귀찮음과 짜증이 배어나는 표정.. 엠마의 작품 모델이었기에 초청장을 보내지만, 설마 오겠나 하는 마음으로 예의상 보냈던 걸까. 어쩌면 초대장은 엠마가 아닌, 조아킴이 보낸 건지도 모르겠다. 

 

 

 

 

결국 아델은 모든 것을 알게 된다. 지금 엠마에게 자신이 어떤 의미인지.. 파란 액자 위에 그려진 얼굴 없는 몸뚱이. 그나마도 흐릿하게 뭉뚱그려진 살덩어리. 선명한 것은 몸뚱이의 구멍 하나.. 아, 이 얼마나 모욕적인 표현인가. 구석진 곳에 걸린 이 그림들을 보는 그 순간 모든 것을 완전히 알아버린 것이다. 이제 엠마 기억 속에 아델은 얼굴없는 흐릿한 몸뚱아리일 뿐이라는 걸..

 

 

모퉁이를 돌아 걸어가는 아델의 발걸음에서는 피가 흥건하게 떨어지고 있다. 이렇게 아델은 인생의 한 마디를 끝냈다. 

 

 

그렇다면 이후 아델은 무엇이 되었을까. 엠마와 함께 살면서 이전 관계들과 분리된 삶을 오랫동안 살아버린 아델이다. 이젠 하소연할 친구조차 남아있지 않았을 그녀 삶에서, 이 감정을 도대체 어디에 토해낼 수 있단 말인가. 이 처참한 감정을 영원히 묻어만 두고 갈 순 없다. 대나무숲에다가라도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치지 않으면, 병나는 게 인간이니까. 

 

 

하여 결국은 자신의 글과 이야기를 통해 자신을 진정시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델의 이야기 3,4 부가 있다면, 이는 분명 작가가 된 아델의 이야기일 것이다. 아니, 어쩌면 작가가 된 아델이 만들어낸 이야기가 바로 이 영화일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시선 속에는 아픔이, 한없는 괴로움이 담겨 있어서...지금 그녀의 상처받은 마음이 얼마나 피흘리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도스또예프스끼 <상처받은 사람들>

 

 

P.S. 너무 긴 런닝타임. 이거 반칙인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