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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1

블랙 스완(2010) : 점프! 점프!

by R.H. 2017. 1. 11.




<스포일러 주의>



"어젯밤 꿈을 꾸었어요"



니나는 자기 일을 잘하고, 열심히 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잘하는 게 다가 아니다. 그 이상이어야 한다. 그 이상이길 꿈꾼다. 그녀 안에서 자라나는 꿈. 무대의 주인공, 독보적인 존재.. 그 꿈이 그녀를 터치했다. 마법을 걸었다. 아니, 저주를 걸었다. 꿈은 실현될 때까지 인간을 들볶고 괴롭히는 저주다. 



빼앗아라



니나가 원하는 자리는 단원 모두가 원하는 자리다. 동료들과의 경쟁, 질투, 시기심, 미움.. 이런 피곤한 감정들을 끊임없이 마주해야 한다. 무엇보다 현재의 스완퀸 베쓰를 밀어내야 한다. 그렇게해서 저 자리를 차지한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니나 역시 베쓰처럼 비참하게 밀려나야 한다. 언젠가는 겪어야 할 그 미래를 생각하면, 공포스럽다. 두렵다. 하지만 꿈을 꾸기 시작한 이상, 이 모든 감정을 짊어지고 가야 한다. 



넘어서라



그렇지만 동료들과 관계에서 생기는 괴로운 감정들은 직선적이고, 단순하다. 그래서 쉽다. 문제는 엄마와 니나 사이에 놓인 감정이다. 니나의 엄마는 딸의 최대 조력자다. 자기 삶을 희생하며 딸을 서포트한다. 하나에서 열까지 챙겨주고 아끼고 사랑한다. 니나가 스완퀸에 발탁되었을 때, 가장 기뻐한 사람 역시 엄마다. 그런데 이상하다. 일년 365일 체중조절 하는 딸에게 거대한 케익을 들이미는 엄마.. 니나가 곤란해하자, 엄마는 히스테리를 부리고, 기어이 케익을 먹인다. 



더 이상한 건 엄마가 그리는 초상화다.(그것도 울면서 그리는..) 일그러지고 구겨진 인물 초상, 그 옆에 니나 사진이 붙어 있지 않다면, 그림 속 인물이 니나라는 걸 알기 어려울 정도다. 마치 미워하는 여자 연예인 사진을 난도질하는 안티같다. 그렇다. 엄마는 딸을 시기하고 미워한다. 엄마는 딸의 최대 조력자면서, 동시에 최대 방해자인 것이다. 



그러면서 엄마는 은밀하게 딸에게 속삭인다. 너는 이 역할을 감당할 수 없다고, 이 중압감을 이겨낼 수 없다고, 널 망칠 거라고.. 사랑을 주면서 미움을 주고, 용기를 주면서 좌절을 심어주며, 서포트하면서 주저앉히는 엄마.. 무엇보다 엄마는 '내가 너 때문에 내 커리어를 포기했다, 너 때문에 내 인생이 주저앉았다' 라면서 딸에게 죄책감과 부채감을 심어주고 있다. 딸을 감정의 쓰레기통으로 사용하면서 그 쓰레기통을 애지중지한다고나 할까. 아.. 겨울에 산딸기를 따오라는 계모라면 그저 미워만 하면 될 텐데.. 도령과의 사랑을 방해하는 계모라면 그냥 도망가버리고 말 텐데.. 그녀는 친엄마다. 세상의 모든 딸에게 엄마란 존재는 이렇게 복잡하다. 



이렇게 감정을 착취당하고, 인질 잡혀 있는 딸이 엄마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결국 패륜밖에 없다. 니나는 엄마의 손가락을 분질러버리고, 엄마를 내동댕이치고, 악담을 퍼붓고는 핑크핑크한 소녀 방에서 뛰쳐나온다. 



불순해져라



"순결하고 때 묻지 않는 소녀, 착한 소녀가  백조의 몸에 갇혀 자유를 갈망하지만 오직 진실한 사랑만이 마법을 깰 수 있어."



성장과 불순은 동의어다. 그녀가 성장하기 위해선, 인형으로 가득 찬 저 핑크핑크한 방을 탈출해야 한다. 순결한 백조는 죽어야 한다. 성장하기 위해서는, 뛰어넘기 위해서는, 자신 안의 어둠을 끄집어내야 한다. 베쓰가 가졌다는 그 '어둠의 충동'.. 그것이 베쓰를 완벽에 이르게 했고, 파괴에 이르게 했다. 니나에게도 그 어둠의 충동이 있다는 걸 토마스는 알아보았다. 니나 안에는 꿈틀거리는 어둠의 날개가 있다.



그녀 안에서 자라나던 어둠의 꿈은 결국 날개를 편다. '나는 스완퀸이다' 라는 자기선언을 한 그녀는 순식간에 달라진다. 죄송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고, 징징대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울먹이듯 말하던 소녀는 이제 당당하게 자기 역할을 요구하는 여왕이 되었다. 이제 순수한 백조는 피 흘리며 죽었다.(이 장면은 성적 뉘앙스를 담고 있기도 하다.)



"이 고통을 끝내기 위한 길은 오직 하나야. 넌 두렵지 않아. 받아들이는 마음뿐이야...점프! 점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