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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리뷰/기타미드

My Own Worst Enemy 1시즌

by R.H. 2009. 8. 19.


<스포일러 주의>

 

1화 : 나는 누구인가

 

어느 날 갑자기 머리가 띵해진다. 잠시 머리가 어지러운가 해서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니, 낯선 곳에서 누군가를 암살하려 매복하고 있는 자신이 있다. 나는 도대체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자신의 모습에 당황한 그는 실수로 총을 쏘고, 그 곳은 난장판이 된다. 내가 누구냐? 여기서 무엇을 하느냐? 라는 질문을 할 겨를도, 생각할 시간 따위도 없다. 지금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판국이다.

 

이 드라마는 한 남자의 몸에 두 개의 인격체가 공존하는 이야기다. 에드워드 올브라이트는 정부 비밀 요원이다. 그리고 그의 분리된 인격인 헨리 스피비는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가장이다. 에드워드는 잠을 자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에드워드의 수면은 헨리의 삶이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프로그램에 무언가 문제가 생겼는지 에드워드의 시간에 헨리가 깨어난다. 그리고 일은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헨리는 에드워드의 상관에게 에드워드가 왜 자신의 삶을 이런 실험에 바쳤는지 묻는다.


“사람에게는 하고 싶지는 않지만, 해야 하는 일을 하는 자유 의지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서 란다. 이에 헨리는 "말도 안돼" 라고 답한다. 헨리의 "말도 안돼" 라는 저 말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이해 못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헨리는 에드워드의 일부분이다. 그런데 헨리는 에드워드를 모른다. 드라마가 진행되는 과정은 헨리의 에드워드 알아가기 과정일 것이다. 바꿔 말하면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시청자 역시 헨리의 입장과 비슷하다. 우리 역시 에드워드를 잘 모르고, 그가 말한 자유의지의 증명이 뭔 말인지 이해가 안 간다. 시청자는 이제 헨리의 눈으로 드라마를 따라 갈 것이다. 동시에 헨리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이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 삶을 살아가는 과정이 나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이라는 점, 그리고 헨리와 에드워드가 동일인이지만 영원히 서로를 만날 수 없는 것처럼, 우리 역시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묻고 답하는 인생을 살아가지만 완전한 나를 만날 수는 없다.

 

드라마의 첫 장면에서 한 남자는 자신이 에드워드라고 밝히면서 누구에게 이상한 지시를 내린다. 그리고 말한다. "Your life depends on it." (네 삶은 이것에 달렸다.) 도대체 에드워드라는 이 남자는 누구에게 말하는 것이고, 이것(it)은 또 무엇일까?

 

2화 : 인간의 양면성

 

"The switch break or did somebody break it?"
[전환장치가 망가진 거야, 아니면 누가 장치를 망가뜨린 거야?]

 

이번 에피의 초반부에 에드워드가 묻는 말이다. 위의 질문은 이 드라마가 전개되면서 나올 또 다른 이야기의 가능성을 품고 있는 복선일 것이다. 어쩌면 프로그램이 문제가 아니라 누군가가 새로운 형태의 실험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차피 헨리는 실험물 아닌가. 그리고 트럼블이라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에드워드의 시간에 깨어난 헨리는 어쩔 수 없이 테러 용의자를 고문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현재 헨리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직속 상관 마비스의 도움으로 테러 용의자를 심문한다. 그런데 트럼블은 자신의 사무실에서 이 모든 사실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다. 그렇다면 에드워드의 첫 질문처럼 트럼블이라는 인물이 또 다른 실험을 하고 있는 걸까? 

 

헨리는 자신의 어린 시절의 기억조차도 모두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학교 동창인 의사 친구를 찾아가 뇌 촬영을 한다. 그리고 자신의 뇌에 칩이 박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런데 에드워드의 시간을 거치고 다시 헨리로 돌아와 보니 그 의사 친구는 죽어 있다. 헨리는 유리 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노려본다.

 

"에드워드는 악마야."
"하지만 네가 에드워드야."

 

마비스의 사무실에 걸려있는 그림에는 두 얼굴을 한 남자가 있다. 이것은 에드워드와 헨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4화 : 양심

 

"양심은 대화의 상대자가 없는 대화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하는 일종의 독백 형태의 대화이다. 사실 언제나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우리의 곁에 머물고 있으면서도, 늘 우리를 나 자신 앞에 홀로 마주 대하게 하는 이 이중적인 존재에 대해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하겠는가? 즉, 나와 함께이면서도 늘 타자인, 그러면서도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의미에서 타자(alter ego)는 아닌 이 존재를, 즉 언제나 현존하면서도 도처에서 부재하고 어디에나 편재하면서도 실제적으로는 어느 곳에도 없는 이 존재를 과연 뭐라 불러야 하겠는가? 부재하고 텅 빈 시선으로 날를 바라보는 주체이자 객체인 이 존재에 대해 부여할 수 있는 이름은 내면적인 동시에 비인칭적인 이름인 '양심'밖에는 없다."
                                          인간 내면의 도덕적 양면성  -블라디미르 얀켈레비치Vladimir Jankelevitch

 

 

에드워드는 국가 비밀요원이다. 그는 거리낌없이 사람을 죽이고,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잔인하게 고문한다. 나라를 위한 일이라고 해서 모든 것이 합리화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식이라면 고문 기술자 이근안의 행동도 옳은 것이 될 테니...

 
그렇다면 에드워드의 양심은 무엇이겠는가? 헨리는 에드워드 내면에 있는 양심의 소리다. 앞으로도 에드워드와 헨리는 끊임없이 전화기를 사이에 두고 독백 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모습이기도 하다. 우리 모두 역시 자신의 양심을 향해 독백을 하며 살아간다. 동시에 양심은 나약하기도 하다. 이번 에피 도입부에서 헨리는 살인을 방조한다. 그가 직접 살인을 한 것은 아니지만, 주저하고 부정하면서도 살인의 뒤처리를 돕는 우유부단한 헨리의 모습은 양심이란 것이 얼마나 나약한지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