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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리뷰/로스트

Lost 2시즌 : 아나루시아, 독재형 리더쉽

by R.H. 2009. 11. 13.
 


<주의, 스포일러>

I'm going Ana. I Don't want to be a part of this. I know everything you've done for us. And I wouldn't even be alive if it weren't for you. But I'm going.     

버나드 : 난 가겠소. 이 일에 말려들고 싶지 않아요. 당신이 우릴 위해 많은 일을 한 걸 알아요. 그리고 당신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난 살아있지도 못했을 거요. 하지만 난 가겠소.  -  2시즌 8에피 Collision

 
비행기 꼬리 부분 생존자들을 통솔하는 아나루시아. 치켜 뜬 눈 하며, 신경질적인 말투, 모든 사람을 하인 부리 듯 하는 태도. 상당히 거슬리는 여자다. 하지만 그들은 그녀의 독재형 리더십을 순순히 따랐다. 상황이 열악했기 때문이다. 생필품은 전무 하다시피 하며, 비행기 추락 이후 곧바로 시작된 디아더스의 납치. 이 척박하고 힘든 상황에서 누군가의 강력한 통솔은 생존을 위한 최선이다. 먹는 것도 부족하고, 알 수 없는 적들의 공격을 받는 상황에서 토론이니 의견 수렴이니 하는 것을 할 여유 따윈 없다. 그래서 그들은 아나루시아의 독재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바뀌었다. 위험한 정글도 빠져 나왔고, 생필품이 풍족한 저들의 캠프는 지척거리다. 한마디로 형편이 나아진 것.
 
그런데 아나루시아가 실수로 사람을 죽이면서 상황이 복잡해졌다. 게다가 그녀의 독선은 도를 넘기 시작했다. 자기 잘못을 인정하기는커녕, 사이드를 잡아 묶어놓기까지 한다. 생사 기로에 있는 소이어는 안중에도 없다. 그러자 그들은 이 독재자 곁을 떠나려 한다. 아나루시아가 힘들어하는 이 상황에서 그녀 편에 서지 않겠다고 한다. 버나드의 말처럼 아나루시아가 아니었다면, 그들은 진작에 죽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가고자 한다.

아나루시아의 최측근이나 다름없는 에코가 가장 먼저 가버린다. 리비는 한 술 더 뜬다. 네이든을 구덩이에 가둔 사건을 끄집어 내어 아나루시아의 판단 미스를 비난한다. 사실 네이든 사건은 리비가 주도한 것이나 다름없는데 말이다.

형편이 좀 피니까 떠나겠다는 그들이 무정해 보이는가? 의리도, 인정머리도 없는 이기주의자들로 보이는가?
 
그렇지 않다. 섬의 대중인 그들은 현명한 것이다. 그들이 빈곤하고, 척박한 환경에 있을 때 그들은 독재를 선택한 것이다. 시대와 상황이 독재자를 원했던 것이다. 그런데 상황이 바뀌었고, 그들은 새로운 리더십을 선택하고자 하는 것이다. 아나루시아도 그들의 냉정한 선택을 받아들여야 한다. 세상의 모든 리더들은 시대가 부른 것 뿐이니... 새시대가 도래하면, 그 자리에서 순순히 물러나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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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속 대중인 그들은 이처럼 냉정한 현명함을 가지고 있다. 고마운 건 고마운 거고, 아닌 건 아니라고 분명히 선을 긋는다. 그런데 현실의 대중은 왜 이리도 뜨뜨미지근하단 말인가. 로스트의 대중들은 독재자를 추억하지도, 그리워하지도 않건만, 현실의 대중은 왜 이리도 독재자를 추억하는가. 우리에게도 독재가 필요한 척박한 시대가 있었다. 하지만 시대가 변했다. 드라마 속 대중인 그들처럼 독재자에게 고마운 건 고마운 거고,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