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미드리뷰/로스트

로스트 5-13 Some Like It Hoth : 아버지, 복잡 미묘한 그 이름...

by R.H. 2009. 9. 7.

 

<주의 강력 스포 포함. 과다한 해석일 수 있음>

  

지금까지 로스트 등장 인물 가운데 아버지와 문제가 없는 인물은 찾기 어려울 정도로, 로스트에서 아버지라는 단어는 매우 복잡 미묘하다. 잭에게 아버지는 넘어야 할 산이고, 케이트와 로크에게 아버지는 반드시 도려내야 하는 썩은 고름이다. 진수에게 있어서는 부끄러운 존재이며, 헐리에게 아버지는 책임감 없는 이기적인 존재다. 그 밖에도 어린 아들을 학대하는 벤의 아버지, 어린 아들에게 칼 쥐어주며 닭모가지 쳐내라는 잔인한 사이드의 아버지 등등. 로스트에서 아버지는 시종일관 부정적인 모습이다.

 

근원으로서의 아버지

 


그렇다면, 마일즈에게 아버지는? 그에게도 아버지라는 단어는 무겁고, 버거운 단어다.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았다고 믿고 있는 마일즈는 아버지를 증오한다. 동시에 왜 아버지가 자신과 어머니를 버렸는지 알지 못한다. 게다가 죽은 사람과 대화 할 수 있는 남다른 능력을 가진 마일는 왜 이런 희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한다는 것. 참으로 갑갑하고, 속 뒤집어질 일이다. 자신이 남들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다면, 그 근원은 분명 아버지로부터 왔을 것이다. 근원에 대한 물음.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에 대한 물음. 우리가 신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마일즈는 답을 알 수 없는 이 물음을 언제부터인가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돈으로 채우기 시작한다. 충족되지 못한 무언가에 대한 보상 심리다. 세상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그의 공허함을 채울 길은 자신의 근원(아버지) 을 만나는 것이다.

 

지금까지 로스트에서 아버지는 대체로 청산해야 할 대상, 극복해야만 하는 존재였다. 그런데 자신의 근원에 대한 물음과 이에 대한 답으로써의 아버지라는 점에서, 마일즈의 경우는 약간 다르다. 그는 자신의 평생을 괴롭힌 근원의 문제에 대한 답을 이번 화에서 푼다. 자신의 아버지가 자신을 내팽개친 것이 아니라, 마일즈를 보호하기 위해 떠나 보낼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알면서, 아버지에 대한 증오가 해소된다. 그는 아버지를 이해한다.

 

여기서부터는 좀 생뚱스럽고, 쓰잘데기 없는 소리를 한 번 해보려 한다.

 

아버지, 참으로 복잡 미묘한 그 이름이여...

 

로크나 케이트, 벤처럼 아버지를 살인 혹은 간접 살인 하는 내용이 한국 드라마에서 나온 다면 어떤 반응일까? 막장 패륜 드라마라고 하지 않을까? 시도 때도 없이, "아버지를 죽여라." "아버지는 나쁜 놈, 잔인한 놈, 이기적이고 무책임 한 놈." 이라고 말하는 로스트. 생각해보니 한국 드라마에서 아버지한테 대드는 내용은 많아도, 쇠사슬로 목 졸라 죽이고, 불태워 죽이고, 가스로 질식시켜 죽이고 등등의 내용은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것도 드라마 하나에서 저렇게도 많은 아버지 죽이기라는 내용은 정말 찾기 어려울 듯.

 

하지만 로스트를 애청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다. 로스트가 말하는 아버지의 의미를. 아버지는 우리를 세상에 내놓은 창조자이고, 우리를 먹이고 길러주는 보호자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넘어야 하는 산같은 존재다. 더 나아가 사회적 의미에서 아버지는 구세대, 기득권층, 전통 세력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때론 청산의 대상이다.

 

로스트를 통해 추측해 볼 때 서양 사람들은 아버지 (개인적 의미만이 아닌, 사회적 의미에서의 아버지) 라는 존재를 대하는 방식은 두 가지인 듯하다. 죽이거나, 이해하거나.  로크나 케이트가 전자이고, 진수, 헐리, 마일즈가 후자의 경우이다.

 

과거가 반드시 청산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떤 과거는 반드시 쓸어내야 한다. 케이트와 로크의 아버지처럼 썩은 존재는 결코 함께 갈 수 없다다. 한마디로 썩은 건 확실히 도려내고, 이해할 건 이해하자고 말한다.

 

그런데 동양적 관점에서 아버지를 죽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버지가 자식을 죽이는 것은 용납해도, 자식이 아버지를 죽이는 것은 이유 불문 패륜이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일 수는 있어도, 사도세자가 아비를 죽이는 일은 일어날 수 없고, 성공한 적도 없다. 아버지가 제아무리 막장이라 할지라도 아들이 감히 아버지를 처단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생각.

 

우리가 그리도 과거를 청산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구세대들이 아무리 막장이라 한들, 어떻게 감히 나이 어린 놈들이 어른들의 목에 칼을 겨눈다는 것인가. 우리가 아버지에게 대들기는 해도 결국에는 복종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 무의식에 담겨 있는 바로 이것 때문이다. 이것이 근대 서양은 혁명으로 왕조를 타파한 역사를 가졌지만, 우리는 그러한 역사를 가지지 못한 이유 아닐까?

 

아버지(구세대) 로 대변되는 과거 청산을 '뭔지는 모르겠지만 뼈가 시리도록 두렵다.' 고 여기는 것은 우리의 무의식 속에 자리잡은 올가미다.

 

그렇다고 이것이 동양이 서양보다 열등한 의식 - 혹은 노예근성, 무지몽매함- 을 가지고 있다는 말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서양인 역시 '뭔지는 모르지만 뼈가 시리도록 두렵다' 는 개념인 원죄라는 것이 있다. 무턱대고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죄인이라는 개념. 참으로 막연하기 짝이 없으며, 어이없기가 하늘을 찌르지만, 이 황당한 개념에서 그들은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역성  혁명을 상징하는 부계 살인을 막연하게 두려워하는 동양인처럼, 밑도 끝도 없는 황당 개념인 원죄를 두려워했던 서양인 역시 무지몽매하기는 매한가지이다.

 

그런데 로스트라는 한낱 드라마 하나 보면서, 아버지로 상징되는 과거 청산이니 혁명이니, 원죄니 하는 얘기를 왜 하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로스트 애청자라면 이번 시즌 로스트의 마지막 장면이 얼마나 도발적인지를 짐작했을 것이고, 이 마지막 장면을 이야기 하기 위해서는 이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해야 할 듯하다.

 

우리가 지금 민주주의라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 인류의 역사에서 볼 때 이게 정말 최근에서야 이루어진 일이다. 우리의 반만년 역사에서 왕이 사라진 것은 이제 겨우 100년이다. (그것도 우리가 왕을 끌어내리지도 못하고.) 게다가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있는 기간은 채 몇 십 년이 되지 않는다. 인류의 전 역사를 뒤돌아 볼 때, 서양 역시도 혁명으로 왕을 끌어내린 것이 불과 몇 백 년 전이다. 왕은 신의 아들이었고, 신에게 권력을 위임 받은 자였다. 혹은 '짐이 곧 국가니라' 라고 공언하기도 했다.

 

지금이야 민주주의가 지극히 당연하게 느껴지지만,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신과 동일시되는, 혹은 국가와 동일시되는 왕을 끌어내린다는 것은 상상 못할 도발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려는 이야기를 마지막 회에 던졌다. 지금까지 로스트에서 보여 준, "네 안의 아버지를 죽여라." 가 위에서 말한 정치적 도발의 발언이었다면, 이번 마지막 회는 "네 안의 신의 죽여라" 라는 뉘앙스를 풍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마지막 회의 벤과 제이콥의 모습은 반기독교적이고 반종교적이다. 이것은 마지막 회 리뷰에서 쓰기로 한다.

 

그리고 로스트하고 별 상관은 없지만,

진수가 아버지를 부끄러워하는 이유는 가난때문이다. 참 우리의 모습과 너무도 많이 닮은 듯. 우리 사회에서 "잘 살아보세" 라는 구호가 절대 가치가 되면서, 가난은 부끄러운 죄악이 되었으니 말이다. 가난이 자랑거리는 아니지만, 범죄는 아니지 않은가. 진수 아버지가 가난은 하지만 성실하고, 때묻지 않은 착한 어부 아닌가. 이것이 죄이고, 부끄러워해야 할 일인가?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하는 과거는 가난했던 시절이 아니라, 민족을 팔아먹고, 국민의 등골을 빼먹은 자들을 처단치 아니한 시절이거늘. 정의가 사라지고, 페어플레이가 힘든 상황에서 가난은 부끄러운 것도 죄도 아니다. 진정 부끄러운 것은 바로 페어플레이가 가능한 정의를 실현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 안에는 도대체 어떤 텅 빈 구멍이 있기에 그리도 돈돈돈 하는 것일까?

 

But all the money in the world isn't gonna fill that empty hole inside you, Miles.

[세상의 모든 돈으로도 네 안의 텅 빈 구멍을 채우지 못해, 마일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