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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리뷰/카니발

Carnivale 1-7 The River : 자유의지의 포기는 악

by R.H. 2009. 8. 13.
Justin Crowe:
I Killed him. This is not visited upon me. This is my birthright.
[내가 그를 죽였어. 이것(악)이 날 찾아온 게 아냐. 난 타고난 거야.]


 

저스틴의 자유의지는 무너져 내리고...


소외 받는 사회계층을 위해 동분서주 하며 의욕적으로 세운 교회가 불타버리자 저스틴 절망하고, 좌절한 채 길 위를 방황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어느 강 다리 위에서, 의식과 무의식의 몽롱한 경계선에서, 저스틴은 자신의 본질을 자각한다. 그는 악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그가 지난 시절 했던 선한 행동들은 그렇다면 무엇일까? 저스틴은 완전한 선도, 완전한 악도 아니다. 그는 보통의 우리처럼 선과 악, 빛과 어둠, 자유의지와 운명의 사이에서 방황하는 하나의 인간일 뿐이다. 그는 자신의 자유의지로 "선" 하고자 발버둥쳤다. 그리고 그 선함의 결정체인 사회적 약자를 위한 그의 교회가 무너져 내리면서, 그의 자유의지는 무너져 내리고, 자유의지를 포기해버린다. 그리고 말한다. 자신은 악이라고...

 

인간의 본성에는 선과 악이 뒤엉켜 있다. 그리고 우리는 자유의지의 노력으로 우리 안의 악을 붙들어 놓기 위해 발버둥친다. 하지만 참을 수 없는 고난이 닥쳤을 때 과연 자유의지를 끝까지 부여잡을 수 있을까? 저스틴은 처절한 절망에 부딪히자 자유의지를 상실하고 자신 안의 악이 날뛰게 방치하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드라마는 자유의지와 운명의 대결이 주된 내용이 아니다. 이 드라마는 주어진 운명 속에서 우리의 본질은 변할 여지가 없다고 말한다. 저스틴이 자신의 선한 의지가 결국에는 무너져 내리듯이.. 그렇다면 왜 이 드라마는 인간은 타고난 자신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다는 무기력하고 어두침침한 운명론을 확정적으로 말하는 걸까? 사실 자유의지와 운명의 대결이라는 주제는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데 매우 유용한 재료다. 이 둘 사이에서 방황하고 허둥대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리는 것은 모든 인간의 눈을 사로잡을 고대로부터의 쓸모 있는 이야기 구조다. 그런데 왜 이 드라마는 이 갈등 요소를 포기했을까? 이것은 이 드라마가 1930년대의 대공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데서 이유를 찾을 수 있을 듯 하다. 이 시대의 배경을 간략하게 깔고 가기로 한다.

 

1930년대 경제 대공황

 

1914~1918년의 제 1차 세계 대전, 서방동맹의 군수품 주문을 시작으로 미국은 전쟁으로 먹고 살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것이 1920년대 미국의 번영을 가져온다. 또한, 1920년대는 기술혁신의 시대로 최초의 라디오 방송, 실용적 티비 방송 등이 이루어지기 시작하고, 대중적으로 자동차와 전화 등이 보급되기 시작한 시대였다.

 

그러나 신기술의 발달과 전후 복구에 의한 활황으로 경제적 전성기를 구가하기는 하지만 당시 노동자의 환경은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당시 제철소 노동자가 하루 12시간 이상의 노동에, 한 달에 두 번만의 휴일을 가질 정도로 노동착취가 극심했다. 또한 1차 대전 이후 각국의 보호무역주의와 선진국의 블락경제 형성으로 미국의 농가는 수출 활로가 대폭 감소하여, 농민 계층의 삶 역시 열악했다. 한마디로 자본가와 노동자의 빈부격차가 극심한 시기였다.

 

이런 가운데 1929년 주식시장의 붕괴를 시작으로 금융시장이 붕괴하고, 경제는 대공황에 빠지는데, 이 경제 대공황은 수년에 걸쳐 지속된다. 그리고 1939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무기력의 시대

 

저스틴의 교회가 폭삭 주저앉아버렸듯이, 이 시대의 경제는 그렇게 폭삭 꺼져버렸다. 자신이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그리고 아무리 발버둥쳐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다는 것을 몸서리치게 느끼는 무기력의 시대. 이 때 인간은 완전무결한 절대자를 찾기 시작한다. 고정불변의 운명을 믿는다는 것은 어쩌면 매우 속 편한 일이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변할게 없다면, 고통스럽게 "노력"이라는 것을 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무기력의 시대에 사람들이 쉽게 운명론에 의지하는 이유다.

 

시대는 다르지만, 종교개혁시대에 루터의 신에 대한 절대 복종, 칼뱅의 예정설 역시 이와 같은 무기력을 포함하고 있다.(종교개혁 당시 상황은 자본가들의 독점으로 길드와 같은 중산계급 경제가 무너지던 시대였다. 루터와 칼뱅의 교리는 무너지기 시작하는 중세 경제의 중산 계급의 무기력함과 분노를 포함하고 있다.)

 

루터는 <노예 의지론> 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옹호한 에라스무스를 공격하는데, 여기에는 인간의 무력함이 철저하게 포함되어 있다. " 인간의 의지는 말하자면 하느님과 악마 사이에 있는 짐승과 같다... (중략) 어느 기수에게로 달려갈 것인가. 그리고 어느 편을 추구할 것인가 하는 것은 그 자신의 의지의 힘이 아니라 바로 이 기수들이 힘이며, 그들은 그 힘을 소유하고 또 유지하려고 서로 싸우는 것이다." [에히리 프롬의 자유에서의 도피에서 인용]

 

인간의 자유의지를 포기하는 운명론은 예나 지금이나 어두컴컴한 무기력과, 감추고 싶은 분노가 저변에 깔려있는 것이다.

 

완전무결한 절대자를 찾아서, 그러나 그런 건 없다.

 

무기력의 시대에 인간은 자신을 무의미한 존재로 깎아 내린다. 스스로를 비하하고, 심지어 파괴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것은 전초전에 불과하다. 자신을 천대하는 경향은 나아가 타인을 천대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자신을 파괴하는 성향은 타인을 파괴하는 성향으로 변질되는 것이다.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타인을 사랑할 줄도 모른다" 는 말은 진리다.) 1930년대 세계적인 경제 대공황 이후 대두된 파시즘과 나치즘은 바로 이러한 자기천대와 파괴가 타인에게로 확장된 결과다. 그리고 1939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만다.

 

불안정한 시대에는 자아의 의미가 사라지고, 그 안에 무기력만이 쌓여간다. 경제 대공황이라는 불안정한 시대 상황은 완전한 대상을 찾고 싶은 욕구에 불을 놓는다. 어지러운 세상에 광신적인 종교가 활개를 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파시즘이나 나치즘도 완전한 절대 지배자에 대한 숭배라는 점에서 광신적인 종교와 매한가지이다.)

 

그러나 그런 건 없다. 완전무결한 절대자는 없다. 그것은 허상이다. 자신의 무력감을 해소시키기 위해 만든 환타지 말이다. 힘든 시대에 영웅과 메시아를 고대하고, 심지어는 독재자를 찬양하기 까지 하는 현상은 인간의 집단 무력감에서 비롯된 환타지다.

 

요즘 세태에 들어 하루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자살 기사는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작금의 불안정한 경제, 무기력한 자신, 그리고 자아 천대와 자아 파괴. 그렇다면 그 다음은 무언인가? 역사는 반복된다.

 

우리 안에는 선도 있고 악도 있다. 두 가지 모습 다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것이다. 무기력에 압도되어 자유의지를 포기하지 말자. 절망에 사로잡혀 우리의 안에 있는 악이 날뛰도록 방치하지 말자. 드라마에서 저스틴이 자신의 자유의지를 포기하는 순간 그는 악이 된다. 포기는 악의 시작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