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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1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Lost in Translation) : 소통은 상대에 대한 집중이다.

by R.H. 2009. 8. 16.



<스포일러 주의>
 
 
영화 줄거리는 간단하다. 왕년의 배우 밥은 CF 촬영을 위해 일본에 왔고, 샬롯은 사진 작가인 남편을 따라 잠시 일본에 들렀다. 그리고 우연히 같은 호텔에 머무른 이 두 사람이 서로의 외로움을 이해하고 공감한다는 이야기다. 이게 전부다. 영화는 느린 속도로 전개되고, 스토리는 진부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영화를 보는 내내 지루하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이런 것이 바로 이야기꾼의 재주다. 뻔한 이야기로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
 
누구와도 소통하지 못하는 밥과 샬롯
 
밥은 엉터리 통역관으로 인해 촬영장에서 스텝진들과 제대로 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또한 일본어를 전혀 못하는 그는 일본의 모든 것이 불편하고 어색하기 짝이없다. 하지만 같은 영어를 쓰는 자기 부인과의 전화 통화 역시도 불편하고 어색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샬롯은 자신의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신의 내면을 누군가에게 털어 싶은 것이다. 그런데 그 친구는 샬롯의 말을 듣는둥 마는둥 하면서 자신의 일에만 신경쓴다. 그 친구가 신경쓰는 일이라는 것도 대단히 중요하게 들리지는 않는다. 아마도 일상의 소소한 집안 살림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이렇게 누구와도 제대로된 소통을 못하고 외로워하는 두 사람이 잠이 오지 않는 어느날 밤 호텔 바에서 만났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의 외로움을 이해하고 소통하기 시작한다.
 
소통은 상대에 대한 집중이다.
 
그런데 그들이 나누는 대화 역시 별 내용이 없다. 그들이 인간의 고독과 외로움에 대한 거창한 철학 담론을 나누는 것도 아니고, 종교와 심리학 따위를 운운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의 대화를 자세히 들어보면 그저그런 일상적인 내용이다. 그러나 그들이 서로를 공감하고 소통하고 있다는 것을 관객 역시 느낄 수 있다.
 
대화는 말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그리고 소통은 서로에 대한 집중이다. 밥의 아내는 밥과의 대화에서 밥에게 집중하지 않는다. 샬롯의 친구와 남편 역시 샬롯에게 집중하지 않는다. 대화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말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태도를 상대에게 보이느냐 하는 것이다. 그리고 밥과 샬롯이 소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대화 내용이 아닌 서로에 대한 집중의 태도 때문이었던 것이다.
 
타인과의 소통을 시작한 그들, 타문화와도 소통을 하다.
 
이 영화를 처음 보면서 거슬린게 하나 있었다. 우리가 아무리 일본 까기에 바쁘다지만, 그래도 같은 동양이라고 양것들이 비하해서 묘사해 놓은 걸 보니 거부감이 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영화에 대한 이해 부족이었다.
 
영화를 자세히 보면 이 영화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져 있다. 전반부는 밥과 샬롯이 각각 말도 통하지 않는 이국땅에서 자신의 친구와 배우자와도 소통하지 못한 채 외로워한다. 그리고 영화 중간 이후부터는 밥과 샬롯이 만나고 이해하고 소통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감독이 묘사한 기묘한 일본의 모습은 바로 이 전반부에 집중되어 있다. 엉터리 통역, 이상한 여자의 호텔 난입, 가학적인 일본 티비 프로그램, 지하철에서 거리낌 없이 성인 만화를 보는 일본인같은 기묘한 일본의 모습은 일종의 장치다. 주인공인 밥과 샬롯이 영화 전반부에서 느끼는 고립감과 불편함, 그리고 누구와도 소통하지 못하는 외로움을 극대화 시켜 보여주기 위한 수단인 것이다.
 
그런데 이 두사람이 공감하기 시작하는 영화의 중반부 이후부터는 일본 문화에 대한 태도 역시 미묘하게 달라진다. 그들은 일본인 친구들과 장난감 총으로 놀고, 노래방에 가고, 맥주를 마시며 잡담을 즐긴다. 일본인들과 의사 소통이 안되기는 영화의 전반부와 매한가지다. 그런데 전반부에서 일본을 기이하게 바라보던 그들이 영화 중반부터는 그들과 다른 일본문화를 유쾌하게 즐기고 있다.
 
타인과의 소통에서 중요한 것이 말이 아니라, 집중의 태도인 것처럼, 타문화와 소통하는 것 역시 말을 알아듣는 것이 아니라 태도인 것이다. 밥과 샬롯이 서로에 대한 소통의 방식을 터득한 이후, 그들은 타문화와도 소통하는 방식을 터득한 것이다.
 
이 두사람 사이의 감정은 고요하다. 영화는 격렬한 감정도 자극적인 장면도 없다. 초지일관 인간의 외로움과 소통에 대한 이야기를 2시간 가까이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루하지 않다. 그런데 영화의 마지막에 속삭인 귓속말은 무엇이었을까? 그다지 궁금하지는 않다. 그들이 서로를 이해하는 사람을 만났다는 것을 보는 게 기분 좋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