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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1

태풍 태양 : 어쩌다 여기까지 왔지?

by R.H. 2009. 8. 16.



<주의 스포일러>

 
 모기 - 꿈꾸는 자  " 비겁한 게 나쁜 거야? "
 
모기는 인라인 스케이트 일당 중에 가장 잘 타는 녀석이다. 그런데 그는 세계 대회에 출전해서는 발 한 번 떼지 못하고 단상에서 내려왔다. 그는 두렵다고 말한다. 그는 직업도 없다. 그가 스케이트를 타는 건 타고 싶어서 타는 것 뿐이다.

"세계 대회" 라는 것은 현실의 시스템을 상징한다. 즉, 모기는 시스템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의 여자 친구인 한주가 말하길, 모기는 야망이 없어서 좋다고 한다. 모기에게 있어서 인라인 스케이트는 꿈이지 야망이 아니다. 그리고 꿈과 야망은 다르다.

 
그는 가장 실력 있는 인라인 스케이터지만, 자신의 실력을 시스템 속에서 성공으로 끌어내는 걸 두려워한다. 야망은 없지만 그의 꿈은 크다. 꿈이 크면 두려움의 크기도 똑같이 크다.
 
영화 중반부에 한강 다리 위에서 강 가운데 떠 있는 작은 모래 섬을 바라보면서 모기와 한주가 나누는 대화는 이러한 꿈과 현실 사이의 거리를 표현한다.

모기는 저 모래 섬에 자신만의 인라인 스케이트 장소를 만들고 싶다고 한다.
원래 그 섬은 상당히 컸는데, 사람들이 도시의 아파트를 짓기 위해 모래를 퍼가서 작아져 버렸다고 한주는 말한다. 그 모래 섬은 꿈을 상징하고 도시는 현실의 시스템을 상징한다. 한주의 말을 바꿔 써보면, < 원래 사람들의 꿈은 컸는데, 현실의 시스템과 타협하면서 그 꿈들을 소모해 버렸다. 그리고 그 꿈들은 저렇게 작아져 버렸다.>
 
모기의 마지막 장면은 한강 다리에서 뛰어 내려 모래 섬으로 헤엄쳐 가는 것이다. 즉, 그는 시스템(혹은 현실)이 아니라 그의 꿈을 선택한 것이다. 꿈과 현실은 양립할 수 없는 것인가. 모르겠다.
 
그렇다면 모기가 두려워 한 건 무엇일까? 시스템 속에 파묻혀 들어가 자신의 꿈이 소멸되는 것일까? 아니면 시스템 속에서 자신이 비루하다는 걸 보는 것일까? 도시에서 강으로 뛰어내려 도시 속 고립된 섬으로 헤엄쳐 간 모기는 과연 비겁한 것일까? 모기는 자신의 꿈 속에 자신을 가둬버린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꿈을 만끽하는 것일까?
 
모기의 선택은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젊음과 꿈을 낭비하는 것인지, 아니면 지키는 것인지는 누구도 모른다. 물론 상당수 사람들은 젊음의 소모라고 모기를 비난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누구도 모기의 선택에 가치 판단을 내릴 자격 따윈 없다. 그냥 바라보는 게 우리의 최선이다.
 
갑바-현실을 받아 들이는 자  나만의 꿈이 아닌 우리의 꿈을 위해
 
갑바는 인라인 스케이트장 매니저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도 한다. 그리고 친구들의 뒤치다꺼리를 전담한다. 이런 점에서 갑바는 모기와 대비되는 현실형 인간이다. 또한 그는 CF 촬영 중에 스텝들의 오만 불손한 행동에도 참고 인내한다. 그들의 모욕에도 머리 숙이고 ,허리 굽힌다.
 
갑바가 모기처럼 자신의 꿈만을 생각했다면 현실의 모욕을 견뎌야 할 이유가 없다. 모기처럼 쿨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친구들과 후배들을 생각한다. 인라인 타는 사람들이 양아치라는 낙인이 찍히길 원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선구자가 되고 싶어한다. 후배들에게 좀 더 편한 환경을 만들어주고, 길을 닦아주려 한다. 그래서 그는 현실의 모욕을 인내한다.
 
갑바는 야망이있다. 야망을 갖는다고 해서 세금 더 내는 거 아니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긴 한데, 골치는 아프다는) 그는 현실에서 도망치지도 않고 현실과 날카롭게 대립하지도 않는다. 현실과의 타협과 조화를 원한다. 자신의 꿈이, 그들의 꿈이 시스템 안에서 인정받길 원하는 것이다.
 
그의 마지막 장면은 군입대다. 그는 군입대를 미루지 않는다. 이것은 갑바가 현실을 피하지도 대립하지도 않는 것, 즉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 의미한다. 자신만의 꿈만이 아닌 다른 이들의 꿈도 함께... 그래서 그의 인내와 타협이 가치 있어 보인다.
 
소요-현실은 두렵지만 그래도 꿈을 들이밀어 본다.
 
소요는 고등학생이다. 그의 집에는 무슨 문제가 있는 건지 쑥대밭이다. 고등학생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절제된 감정으로 엉망이 된 자신의 집을 침착하게 아무 말없이 바라본다. 소요는 고함 지르지도 않고, 질질 짜지도 않는다. 물건을 때려부수거나 양아치 짓을 하지도 않는다. 엉망진창인 자신의 집을 마치 제 3자인 냥 무심히 쳐다본다. 이게 가능한가? 어쨌든,
 
소요는 인라인 초보자다. 그런데 종국에 가서 세계 대회에 출전하는 것은 소요다. 소요가 상징하는 것은 모기처럼 꿈만 꾸고 현실을 피하지도, 갑바처럼 현실에 순응만도 아닌 꿈과 현실의 중간점이다. 소요는 두렵지만 세계대회에 나간다. 현실은 두렵지만 그래도 꿈을 그 안에 들이미는 시도를 한 것이다. 소요는 정반합의 자식인 건가?
 
"어쩌다 여기까지 왔지?"
 
꿈을 꾼다는 것은 미래를 계획 한다는 말이다. 우리 모두는 꿈을 꾼다. 어제를 후회 하는 건 좀 더 나은 내일을 계획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계획한 미래가 아닌 엉뚱한 곳에 자리한 자신을 본다. 미래는 우리의 계획 안에 들어 올 수 없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정신 나간 들짐승 같은 것일까?  전혀 예상치 못한 공간에 자리 잡아서 전혀 예상치 않았던 일을 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 나의 모습, 우리의 꿈, 나의 꿈은 어디로 가버린 걸까? 어쩌다 여기까지 온 걸까?
 
"우리는 과거를 반성하지도 않았고, 내일을 걱정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과거를 후회하고, 내일에 대한 염려로 오늘을 소비한다. 저 대사는 그들이 진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러고 싶다는 소망이다. 모기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감추기 때문이다. 내일에 대한 걱정과 불안, 두려움을...
 
이 젊은이들은 자신의 꿈과 현실의 장벽이 충돌하는 태풍 속에 있다. 이 거친 풍랑을, 태풍을 헤쳐나가는 각자의 방법은 다르다. 누가 옳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 태풍 속에서 이 요동치는 소란함 속에서 그들은 살아 남을 것인가? 그리고 종국에 이르러 태양을 볼 것인가? (나 자신에게도 묻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