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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소설

도스또예프스끼 <백야, 1848>

by R.H. 2018.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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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노란색으로 칠하고 있어요!”



8년 동안이나 친한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이 뻬쩨르부르그라에 홀로 살고 있는 우리의 주인공은 몽상가다. 그는 도시 속의 무인도에서 살고 있는 셈이다. 영화 <캐스트 어웨이>의 톰 행크스가 무인도에서 배구 공을 윌슨이라 명명하며, 친구 삼아 살 듯이, 우리의 주인공에게 건물은 친구다. 건물이 인사하고, 노란색으로 새로 페인트 칠 한 건물이 자신을 향해  고통을 하소연한다고 들릴 지경이니.. 분명 제정신이 아니다. 



하얀 밤이 시작되다... 꿈을 꾸다...



운하 제방을 걷던 어느 백야의 날에, 그는 난간에 기대선 어느 아름다운 여자를 본다. 어딘지 모르게 슬퍼 보이는 여자다. 그녀에게 시선이 자꾸만 간다. 그녀도 그의 시선을 느꼈는지 슬금슬금 뒷걸음질 한다. 그런데 그녀에게 찝쩍거리는 어느 중년 남자가 등장한다. 우리의 주인공은 곤란한 상황에 처한 그녀를 구해주고, 이 둘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다. 이거 너무 전형적인 설정이다. 통속 드라마에 흔히 등장하는 장면이다. 게으른 작가들의 방법이다. 



“저는 마치 당신과 20년 동안 친구 사이로 지내 온 것처럼 당신을 잘 알아요”



그나저나 이상하다. 만난 지 몇 분 되지도 않았는데, 그녀는 우리의 주인공을 속속들이 안 단다. 마치 20년 동안 친구 사이로 지낸 것처럼 잘 안다는 것이다. 그냥 고마워서 하는 말일 수도 있긴 한데.. 과연?? 그러면서 하는 말이 우정은 되지만, 절대로 사랑은 안 된 단다. 만난 지 한 시간 된 사이에 이런 말을? 이건 뭔 자신감?? 그녀에게서 어장 관리의 향기가 솔솔 풍겨온다. 그런데 우리의 주인공 역시 이상한 말을 한다.



“어쩌면 당신은 내가 내 자신과 화해할 수 있도록 해주었는지도 모릅니다. 또 나의 의혹을 모두 해소시켜 주었는지도 모릅니다”



도대체 만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런 거창한 말을... 그래. 그냥 소설이니까, 드라마니까, 영화니까 가능한 설정이라고 일단 넘어가자. 여튼 이 둘은 다음날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한다. 



“이야기라니! 누가 그러던가요, 나한테 이야기가 있다고? 난 들려드릴 이야기가 없어요”



두번째 밤에 여자는 남자에게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한다. 서로의 직업, 나이, 사는 곳 같은 기본적인 호구 조사도 하기 전에 대뜸 ‘이야기'를 해 달라고 한다. 남자의 반응도 웃기다. 그냥 자기 소개를 하면 될 걸, 펄쩍 뛰면서, 자기한테는 이야기가 없다고, 누가 그러더냐고 묻는다. 누가 그러더냐니.. 그냥 자기 소개 하라고요, 이 사람아..



몽상가의 이야기... 이야기를 이야기하다..



“당신에겐 이야기가 있어요. 그냥 숨기고 계실 따름이에요”



이에 여자는 남자를 격려한다. 그러면서 자기 이야기를 살짝 흘린다. 미끼 던지듯이 말이다. 나한테도 이야기가 있다. 왜 당신한테 이야기가 없겠느냐, 당신의 이야기를 해 봐라, 그러면 나도 내 이야기를 하겠다는 식이다. 남자가 이야기를 할 수 있게 용기를 주고, 호기심도 자극한 것이다. 이쯤 되면 느낌이 슬슬 온다. 과연 이 여자는 세상에 존재하는 여자일까… 이 여자는 이청준 소설 <퇴원>에 나오는 윤 간호사 같은 존재다. 당신에겐 분명 이야기가 있다면서, 그 이야기를 밖으로 내보일 것을 격려하던 윤 간호가 말이다. 



자, 하여 용기를 얻은 우리의 주인공은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런데 만난 지 이틀 된 사이에 들려줄 만한 자기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니까, 보통 해야 할 법한 얘기인, 자기 소개가 아니다. 더 희한한 점은 이들이 통성명을 하는데, 여자는 나스쩬까라고 자기 이름을 밝히는데, 남자는 이름도 말해주지 않는다. 



남자는 자기 신상은 아무 것도 알려주지 않곤, 곧바로 몽상가에 대해 말하고, '이야기'에 대해 '이야기'한다. 특이한 점은 자기 이야기에서 주인공을 '나'라고 칭했다가, ‘우리의 몽상가' 라고 칭했다 하면서 인칭을 섞어 쓰고, 문어체로 말한다. 여자는 그 포인트를 집어낸다. 마치 소설을 교정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그런데 잠깐만요, 당신은 참 유창하게도 말씀을 하세요, 하지만 어떻게든 그보다 덜 유창하게 말씀하실 수는 없으세요? 당신은 마치 책을 읽는 것처럼 말씀을 하시는군요”



나스쩬까의 이야기... 책을 사랑한 소녀, 탈출하는 소녀..



남자의 이야기를 다 들은 나스쩬까는 이제 본격적으로 자기 이야기를 시작한다. 나스쩬까는 앞이 보이지 않는 할머니와 살고 있는데, 할머니는 그녀를 감시하기 위해 옷핀으로 나스쩬까를 항상 옆에 잡아두고 있다고 한다. 어느 날 할머니 집에 새 하숙인으로 젊은 남자가 들어온다. 할머니는 그가 나스쩬까를 꼬득일까 경계한다. 그 젊은 남자는 그녀들에게 책을 빌려주고, 극장도 같이 다니면서 호감을 산다. 그리고 나스쩬까는 책 없이는 살 수가 없게 된다. 그녀는 책을 사랑하게 되고, 책에 중독된 것이다. 



그런데 이 하숙인이 일 년 간 모스끄바에 가 있어야 한다는 소식을 알려온다. 이에 나스쩬까는 다짜고짜 옷 보따리를 싸서 그 남자의 방문을 두드린다. 그 남자 없이는 살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나스쩬까가 사랑한 것은 책이었을까? 그 남자였을까? 그녀는 책 없이 살 수 없었던 것일까… 그 남자 없이 살 수 없었던 것일까.. 나스쩬까에게 그 젊은 남자는 문학(소설과 희곡, 책과 극장)의 소개자다. 책이 그 남자고, 그 남자가 책이다. 남자는 나스쩬까에게 기다리라면서, 꼭 일 년 뒤에 이 도시로 돌아올 테니, 그때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한다. 그리고...



“정확히 1년이 지나갔어요. 그 사람은 사흘째 여기 와 있어요. 그런데, 그런데…”



그녀가 슬퍼하고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이에 우리의 주인공은 사랑의 메신저가 되기를 자청한다. 그러면서 나스쩬까에게 편지를 써서 자신한테 주면, 자기가 그 편지를 그 남자에게 전달하겠다고 제안한다.



“여기 편지가 있어요. 그리고 여기 씌어 있는 게 가져가야 할 댁의 주소에요”



응?? 그녀는 이미 편지를 써 놓았다. 게다가 남자의 주소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자기가 직접 전달하면 될 일 아니었나.. 아니 우체국을 이용하면 될 일 아닌가.. 그래, 그냥 여자가 망설이고 주저하고 있었다고 생각해주기로 하자. 여튼 이것도 참 어설픈 설정이다. 초보 몽상가의 손길이 느껴지는 설정이다.. 이렇게 해서 두 번째 밤이 지나간다..



세번째 밤에도 이들은 만난다. 나스쩬까가 사랑하는 남자가 그 장소에 나오길 기다려 보지만, 그는 오질 않는다. 슬퍼하는 나스쩬까와 이를 위로하는 주인공… 이렇게 해서 세 번째 백야도 지나간다.



네 번째 밤에도 나스쩬까가 사랑하는 남자는 나타나지 않는다. 절망하는 나스쩬까.. 그리고 우리의 주인공은 드디어 나스쩬까를 향한 사랑을 고백하고, 나스쩬까는 그의 사랑을 받아들인다. 그 남자는 오만하다면서 다정한 우리의 주인공을 사랑한단다. 이제 이들의 진도가 급속도로 빨라진다. 할머니를 모셔야 한다 어쩐다 하면서, 우리의 주인공이 나스쩬까의 집으로 이사 가는 것까지 이야기가 진행된다. 이들은 이제 손잡고 거리를 쏘다니며 행복한 데이트를 즐긴다. 그런데…



“나는 오랫동안 서서 사라져 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그 둘 모두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 남자가 나타났다. 갑자기 뜬금없이 나타났다. 그러자 나스쩬까는 우리 주인공의 손을 뿌리치고 그를 향해 “총알처럼" 달려간다. 우리의 주인공은 “죽은 사람처럼" 서서 그들은 바라본다. 이게 도대체 뭔 시츄에이션이란 말인가. 이게 말이 되는가?? 나타난 남자가 우리의 주인공에게 말 한마디 건네지도 않고, 나스쩬까와 휙 가버리는 게??



아침이 밝아오다... 깨어나다...



이렇게 기묘한 네 번의 하얀 밤이 지나가고, 아침이 왔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편지 한 통이 왔다.



“절 사랑해 주세요, 저를 버리지 말아 주세요.이 순간 당신을 그토록 사랑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저는 당신의 사랑을 받을 가치가 있으니까요. 자격이 있으니까요. 사랑하는 나의 벗이여! 다음 주에 저는 그 사람과 결혼합니다”



이건 또 뭐람?? 나스쩬까는 자기를 사랑해 달라면서, 뻔뻔하게도 자신은  우리 주인공의 사랑 받을 가치와 자격이 있단다. 그리고는 다음 주에 그 사람과 결혼한단다. 네 이년!!!!



근데 이쯤 되면, 눈치 채지 않으셨는지.. 나스쩬까가 과연 실재하는 인물일까? 과연? 이 모든 이야기, 엉성한 이야기가 우리의 주인공인 몽상가가 백야, 즉 하얀 밤에 눈을 뜬 채 꾼 꿈 아닐까? 백일몽 말이다.. 위에서도 여러 번 언급했듯이, 네 번의 하얀 밤에 벌어지는 이 이야기는 이상한 구석투성이다.



첫째, 나스쩬까는 주인공을 처음 만난 순간 20년을 알고 지낸 사람 같다고 말한다. 주인공의 나이는 26세고, 나스쩬까는 20세다. 그러니까 계산상으로 나스쩬까가 태어난 순간부터 주인공을 알았다는 것이고, 주인공이 6세 즈음, 즉 자아가 생겨날 때 즈음부터 알던 사이인 것이다. 그렇다. 나스쩬까는 주인공의 분신이다.



둘째, 나스쩬까는 주인공에게 ‘이야기' 할 것을 격려한다. 당신에게는 숨겨진 이야기가 분명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주인공의 이야기가 너무 문어체인 것을 지적하기도 한다. 나스쩬까로 대변되는 주인공의 분신이 주인공 자신의 글을, 소설을, 이야기를 수정하는 과정이다.



셋째, 그냥 소설이니까...하고 넘어가는 수많은 부분들, 그러니까, 추근덕 거리는 남자에게서 구해주는 뻔한 설정, 두 남녀가 만나자 마자 사랑하시면 안 됩니다,라는 과장된 표현, 통성명도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각자의 ‘이야기'를 장황하게 들려주는 점, 떠난 남자가 돌아오자마자 뭔 말 한마디도 남기지 않고 쏜살같이 가버리는 결말… 이 모든 것이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나같이 말도 안되고 기괴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 도스또예프스끼가 파스텔톤으로 칠해 놓은 덕에 다 그런갑다..하고 넘어간 것 뿐이다. 굉장히 엉성하고 서툰 설정들이고, 뻔한 클리셰로 범벅이 된 초보스런 이야기다. 그렇다. 이 이야기는 젊은 몽상가, 초짜 소설가인 우리의 주인공이 만들어낸 이야기다. 우리가 들은 이야기는 주인공이 그려낸 몽상인 것이다. 하여...



“나는 마뜨료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직 정정한 '젊은' 노파였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갑자기 그녀가 눈이 가물거리고 얼굴에 주름살이 가득한, 허리가 착 꼬부라지고 노쇠한 노파처럼 보였다. 어찌 된 영문인지 내 방도 그 노파처럼 갑자기 늙어 버린 것 같았다. 모든 것이 침침했다. 거미줄은 더욱 늘어났다. 창밖을 내다보자 어찌 된 영문인지 이번에는 건너편의 건물이 늙고 우중충하게 변한 듯이 보였다. 기둥의 회반죽은 벗겨져 무너져 내렸으며 처마 끝은 검게 그을고 여기저기 금이 갔다. 가라앉은 노란색으로 선명하게 보이던 벽은 얼룩덜룩하게 되었다. 아니면, 먹구름을 뚫고 비죽이 나왔던 한줄기 햇살이 다시 비구름에 가리워지는 바람에 모든 것이 내 눈에 우중충하게 보인 걸까. 아니면 눈 앞에서 내 미래의 전망이 침울하고 슬프게 명멸했기 때문일까. 정확하게 15년 뒤의 내 모습, 지금의 이 방에 지금처럼 고독하게, 그토록 세월이 흘러갔어도 조금도 똑똑해지지 않은 마뜨료나와 함께 있는, 지금과 똑같은 내 늙은 모습을 보았기 때문일까..”



그의 몽상이 허물어진 순간을 묘사하는 이 마지막 장면은 그야말로 일류 작가의 그것이다..



추가..


<백야>는 <여주인>의 화이트 버젼이다. 이 두 소설은 '문학의 삼위일체'라는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여주인>의 주인공 오드리노프가 몽상가, 무린은 책, 까쩨리나는 아름다움이었듯이, <백야>의 주인공은 몽상가, 하숙생은 책, 나스쩬까는 아름다움이다. 


또한 <여주인>의 까쩨리나가 들려주는 자신의 이야기는 소녀의 성장 스토리였다. 소녀가 부모의 집을 뛰쳐나가는 이야기 말이다. 마찬가지로 <백야>의 나스쩬까가 들려주는 그녀의 이야기 역시 성장 스토리다. 눈 먼 할머니의 옷핀은 집착하는 모성을 상징하는데, 까쩨리나 역시 이 할머니의 집을 뛰쳐나가, 책으로 상징 되는 하숙생 남자의 품으로 달려간다. 결말 역시 유사하다. 몽상가를 떠나 책으로 달려가는 아름다움.. 그 무분별함까지… 


<여주인>이 블랙톤으로 <백야>는 화이트톤으로 그려냈다는 것 빼고는 거의 같은 이야기, 같은 소재, 같은 결말이다. 백야가 슬프면서도 애잔한 블링블링해서 완전 다른 이야기 같지만... 아님. 같은 재료로 완전 다른 맛, 그러나 결국은 같은 음식을 내놓은 거임. 도스또예프스끼.. 당신은 정말...


"천장에 걸린 거미줄을 모조리 치워 버렸어요. 이젠 당장 색시를 들이셔도, 손님을 부르셔도 문제 없어요"


마지막 장면에서 하녀 마뜨료나가 주인공에게 하는 말이다. 이 말 뒤에 저 위에 묘사한 것처럼 몽상의 제국이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그런데 소설 중반 즈음에 주인공이 나쓰쩬까가 들려준 이야기 속에도 "거미줄"이 등장한다.


"환상의 여신이....변덕스런 손길로 황금의 날실을 짜기 시작했고,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기묘한 삶의 문양을 그의 앞에 펼쳐 놓으려 다가옵니다...(중략) 모든 사람, 모든 사물을 마치 거미줄에 걸린 파리처럼 자신의 화폭에 장난치듯 짜 넣습니다....(중략)...그는 퍼뜩 정신을 차립니다...방 안은 어두워졌습니다. 그의 영혼엔 공허와 서글픔이 깃듭니다. 그의 주위에서 몽상의 왕국이 붕괴되고 있습니다. 흔적도 없이 소리도 없이 파편도 없이 무너져 일장춘몽처럼 스러집니다"


몽상가의 이야기 속의 이야기에서 환상의 여신이 짜서 넣어 놓은 삶의 문양들... 거미줄에 모든 사물이 걸려 있었다. 이야기가 걸려 있었다. 몽상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하녀가 그 거미줄, 이야기의 문양들, 몽상의 화폭들을 치워버리는 순간 "몽상의 왕국이 붕괴"된 것이다....도스또예프스끼.. 소름 끼치는 천재...



"내가 깨어 보니 내 잠이 달았더라"..... <예레미야 3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