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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소설

도스또예프스끼 <여주인, 1847>

by R.H. 2018.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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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신내림이 이루어진 날

 

 

"

그는 이미 오랜 시간 동안 집을 구하느라 열심히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한순간, 그는 갑자기 자기 자신도 알 수 없는 이상한 감정에 빠져들었다. 처음에 그는 얼빠진 사람처럼, 멍한 상태에 빠져 주춤하다가, 조금 후에야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고, 강렬한 호기심을 나타내며, 자기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북적대며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잡다한 인간의 생활상, 소음, 사람의 물결... 모든 것이 그에게 신기하게 느껴졌다."

 

 

대학 졸업 후 3년 간, 외톨이 생활을 한 몽상가 오드리노프는 꿈을 꾸는 자다. 예술에 대한 열정이 있는 자다. 그리고 창조를 열망하는 자다. 아직 제대로 된 무언가를 세상에 내보인 적은 없지만, 이제 막 그 시도를 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새 집을 알아보기 위해 길을 걷는, 아주 무의미하고, 평범하며, 일상적인 순간에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이, 그에게 휘몰아치는 감정이 찾아온다. 주위의 모든 평범한 일상이 갑자기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 첫날이다. 알 수 없는 감정의 폭발이 일어기 시작한다. "취기 비슷한 희열이 꿈뜰거"린다. 

 

 

"예술가의 최초의 환희, 최초의 열정, 최초의 흥분"이 그에게 임했다. 문학의 신, 이야기의 신이 그에게 강림한 것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그에게는 창조적인 능력이 있다는 것이 사실로 받아들여 지고 있었는데, 이제 그 능력이 실제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고, 확실해진 것이다"

 

 

최초의 환희에 정신이 어질어질해진 그는 아무 생각 없이 교회 안으로 들어선다. 텅 빈 교회에서 촛불을 끄고 있는 백발의 교회 지기, 그 어눅어눅한 공간에 들어오는 어슴푸레한 저녁 빛과 넘실거리는 촛불, 그리고 그 빛에 불타는 성상... 이 모든 것들이 빚어내는 기묘한 분위기 속에서 그는 "마음을 뒤흔드는 형언할 수 없는 이상한 아픔과 복받쳐 오르는 어떤 감정에 휩싸"인 채, 교회 안에 앉아 있다. 이때, 교회로 들어오는 늙은 남자와 젊은 여자..

 

 

마치 악마를 연상시키는 듯한 검은 모피가 달린 외투에 붉은 목도리를 한 타오르는 눈빛의 늙은 남자.. 그리고 경이로운 아름다움을 가진,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묘한 두려움과 공포가 그 얼굴에 어려 있는 스무 살 남짓으로 보이는 젊은 여자... 

 

 

"이 사람들에겐 분명 뭔가 이상한 점이 있었다"

 

 

오드리노프는 마치 뭐에라도 홀린 듯 이들 뒤를 쫓지만, 그를 노려 보는 노인의 눈빛 앞에서 발길을 돌린다. 이렇게 이상한 하루가 지나간다. 

 

 

다음날 오드리노프는 한참을 돌아다닌 끝에 어느 독일인한테서 방을 얻고는, 계약금을 주고, 저녁에 이사 오겠다는 약속을 한 뒤, 거리를 나선다. 그런데 자기도 모르게 발길이 어제의 그 교회로 향한다. 교회에는 그가 찾는 사람이 없다. 그는 다시 길을 걷는다. 끝없이 걷는다. 멀리멀리 걷는다.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들판까지 걸어 나간다. 무언가가 자꾸만 그를 잡아당기는 것만 같다. 이때, 등 뒤에서 울리는 교회 종소리... 그는 다시 교회로 돌아간다. 교회에는 어제의 그 여자가 기도를 하고 있다. 흐느끼고 있다. 아아.. 그의 감정도 터져버릴 것만 같다. 이것은 도대체 무슨 감정이란 말인가. 미지의 여인을 다시 따라나선 오드리노프는 홀린 듯이 그녀 뒤를 쫓는다. 

 

 

"그때, 사람들 사이에서 어제 보았던 그 노인이 갑자기 나타나, 그녀의 손을 잡아 끌었다. 오드리노프는 신경질적이고 비웃는 듯한 시선과 다시 마주쳤고, 그는 가슴속에서 어떤 적의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결국, 어둠 속에서 그들의 행방을 놓쳐 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또다시 그녀를 놓치고...다음날 아침 일찍, 오드리노프는 그들이 살고 있는 골목길로 향한다. 좁고 더러운 골목길을 지나 드러나는 검은 건물, 그 건물을 지키는 냉소적인 문지기와 보기 흉한 모습의 노파, 귀머거리 장의사, 그리고 사악한 노인과 그에 사로잡혀 있는 아름다운 여인.. 

 

 

이 공간은 지옥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사악한 노인과 아름다운 여인은 마치 지하의 신 하데스와 페르세포네와도 같다. 오드리노프는 한 시간 뒤 이 집으로 이사한다.

 

 

사악한 노인 무린...이야기의 신

 

 

"그 이후로 그에게는 어떤 이상한 삶이 시작되었다"

 

 

그는 이 집에서 열병을 앓는다. 꿈과 현실이 뒤죽박죽 된다. 가위눌림을 당한다. 환영을 본다. 환상을 본다. 그 꿈에서, 가위눌림에서, 환영 속에서, 악한 노인을 본다. 희미한 얼굴의 악한 노인은 그를 속이고, 놀리고, 비웃고, 두려움에 떨게 한다. 

 

 

"그는.... 요람을 빙 둘러 감싸 주던 요정들을 모두 쫓아 버렸고,... 그를 공포에 떨게 하고, 어린아이에게는 너무 가혹하고 고통스러운 슬픔에 빠지게 하고, 애타게 하는 긴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었다. 악한 노인은... 그가 정신을 잃고 혼수상태에 빠질 때까지 계속 이야기를 했다. 그런 후에, 이 꼬마는 갑자기 성인으로 성장했고, 잠에서 깨어났다"

 

 

악몽에서 깨어난 오드리노프는 벌어진 창문 틈으로 옆방을 들여다본다. 옆방에는 노인 무린이 쇠약한 몸으로 침대에 누워 있고, 그 옆에는 젊은 여자 까쩨리나가 누워 있다. 무린은 그녀에게 이야기를 하고, 까쩨리나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한다. 마치 아버지가 어린 딸에게 동화를 읽어주는 듯한 분위기다.

 

 

그렇다. 그의 꿈 속에서 그를 쥐고 흔들던 희미한 얼굴의 악한 노인은 무린이다. 이 사악한 노인은 문학의 신이다. 이야기의 신이다.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어두운 속성, 악마적 힘을 소유하고 있는 인물이다. 이야기와 관련된 그 모든 상징들에 뼈와 살이 붙어 눈앞에 피어난 존재가 바로 노인 무린인 것이다. 

 

 

그런데... 까쩨리나, 그러니까 노인 무린의 청자였던 까제리나가 이번에는 이야기 꾼이 되어 오드리노프에게 자신의 과거, 그리고 노인과의 관계를 이야기한다.

 

 

또 다른 이야기의 신이자 미의 여신 까쩨리나

 

 

"바로, 오늘 같은 밤이었어요. 단지, 조금 더 음산했고, 우리 집 근처의 숲에서는 내가 이제껏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스산한 바람이 불고 있었어요. 어쩌면, 이미, 이날 밤에 나의 파멸이 시작되고 있었는지도 몰라요"

 

 

까쩨리나를 울고 웃게 만들던 이야기 꾼 무린 못지 않게, 까쩨리나 역시도 대단한 이야기 꾼이다. 그녀가 들려주는 그녀의 이야기는 <한 여자의 집안을 파멸로 몰고 간 사악한 남자와, 그의 손아귀에 사로잡힌 여자>라는 지극히 뻔한 구조의 이야기다. 그러니까, <늙은 대마왕에게 사로잡힌 아름다운 여자와 그 여자를 구하려는 젊은 남자> 이야기는 페르세포네 신화는 물론이고, 소년 만화부터 오늘날의 핑거 스미스에(핑거 스미스에서는 구원자가 같은 여자라는 게 다른 점) 이르기까지 널리 쓰이는 이야기 구조다. 심지어는 게임에서도 써먹는 서사다. 마왕이 미녀를 잡아두고, 미녀를 구출하는 젊은 남자의 이야기 말이다.

 

 

그런데 까쩨리나의 이야기는 구원자의 최종 승리라는 소년 만화 식 결론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녀의 이야기 주인공은 구원자(젊은 남자)가 아니라, 바로 까쩨리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하여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그녀의 성장 스토리다.

 

 

"나는 그때 그 방을 뛰쳐나가, 세상 끝 저 멀리, 폭풍이나 번개가 시작되는 곳으로 달려가고 싶었어요. 소녀 같은 나의 마음은 늪지대를 걷는 것 같았어요...."문 열어!" 나는 어떤 사람이 줄을 타고 창문으로 기어오르는 것을 보았어요"

 

 

자신의 집을 파멸에 이르게 한 남자, 자신의 어머니를 배신한 남자,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남자... 까쩨리나는 이 남자 무린을 증오하면서도 무린에게 자신의 몸을 맡기고, 자신의 인생을 맡긴다. 얼핏 보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여자의 마음처럼 보이지만, 그녀 자신에게는 험난한 성장 과정이다. 성장은 질서 정연하고, 아름답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질서하고, 파괴적이며, 고통스럽게 이루어진다. 그리고 때론 타락과 패륜의 모습을 하고 있다. 

 

 

즉, 무린은 <산딸기 동화> 속 도령의 흑화 버전이다. 소녀를 유혹하고, 소녀를 불순하게 만드는 남자다. 소녀가 자신의 아버지를 배신하고, 어머니를 증오하도록 종용하는 남자다. 하여, 성장을 바라는 소녀는, 방을 뛰쳐나가고 싶은 소녀는, “문 열어", 라는 무린의 요청에 응하고, 그를 창문으로 들어오게 한 것이다. 이 말에는 성적 뉘앙스가 다분하다. 성장과 불순은 동의어인 것이다.

 

 

"내가 고통스러워하고 애통해하는 것은, 지금 내가 굴욕스런 그의 노예라는 것 때문이고, 이런 나의 굴욕과 수치심을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오히려 내가 그것을 은근히 즐기고 있다는 것 때문이에요. 나의 탐욕스러운 마음속에는 왠지 그런 아픔이 기쁨으로, 또 행복으로 여겨진다는 것, 바로 여기에, 그러니까 자신의 치욕에 대해 분노할 줄 모르고, 그것에 대항할 힘도 없다는 것이 지금, 내가 당하는 고통이에요"

 

 

까쩨리나는 무린을 두려워하면서도, 죽일 듯이 미워하고, 동시에 그의 노예라는 굴욕적인 현재 상황을 즐기는 이해 못 할 복잡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슬퍼하면서도 열정적으로 타오르고, 기뻐하면서도 부끄러워하며, 동시에 음탕한 욕망을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그녀는 소녀적 순수함과 닳을 대로 닳은 여자의 음욕을 동시에 가지고 있으며,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이다. 

 

 

한마디로 그녀는 무분별하다.

 

 

이것은 그녀가 이야기 꾼이자, 성장을 바라는 소녀면서 동시에 미의 원형이기 때문이다. 감정이 들쑥날쑥하고, 이성적인 판단을 전혀 할 줄 모르며, 통제 불가능한 비도덕적인 여신 아프로디테와 같은 미의 원형이기 때문이다. 하여 소녀는 성장을 바라지만, 결국 성장하지 못한다. 그리고 앞으로도 성장할 수 없다. 자신의 방을 뛰쳐나와 불순해진 것. 그것이 그녀 성장의 최대치다.

 

 

하여, 그녀는 영원히 악한 노인 무린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아니,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까쩨리나는 젊은 남자를 따라나서지 않을 것이다. 그 젊은 남자가 무린보다 더 매혹적인 이야기, 더 강렬한 이야기, 더 음탕한 이야기, 더 잔인한 이야기를 제공하지 않는 한, 미의 여신은 결코 무린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예술의 삼위일체

 

 

노인 무린이 이야기 꾼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오드리노프의 꿈속에서, 끝없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악한 노인과 현실에서 까쩨리나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노인 무린.. 그는 이야기의 원형이다. 까쩨리나는 무린의 청자면서, 제자다. 그녀 역시 이야기 꾼의 자질이 대단한데, 그녀는 독립을 못 한다. 아니 안 한다. 왜냐면, 그녀는 미의 원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몽상가 오드리노프는 이 기묘한 홀림 이전에 원고를 쓰고 있었다. 즉, 그는 이야기 꾼으로서 등단을 바로 코 앞에 둔 예술가다. 그는 무린(이야기)과 까쩨리나(미)에 홀린 것이다.

 

 

하여, 이 소설은 이야기의 신, 미의 여신, 그리고 예술가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다. 그들은 삼위일체다. 성자 성부 성령처럼, 무린(이야기의 신), 오드리노프(창작자), 까쩨리나(미의 여신)는 삼위일체다. 그들이 모여야 하나의 이야기가, 창조물이, 예술이 세상에 나올 수 있다. 

 

 

"나의 여왕이시여! 노인이 말해다... 나의 군주여! 온몸을 떨며 이번엔 오르디노프가 속삭였다"

 

 

그렇다면, 무린이 오드리노프고, 오드리노프가 무린이며, 까쩨리나 역시 오드리노프 아닐까... 창작자 오드리노프의 관념 속에 존재하는 문학의 이데아가 노인 무린으로, 미의 이데아가 아름다운 여인 까쩨리나로 현신한 것 아닐까. 이 모든 것이 몽상가가 눈을 뜨고 꾼 꿈은 아니었을까.

 

 

독일인 집에서의 생활은 단 한 가지로 아주 단조롭고 평화로운 것이었다

 

 

헌데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정신을 홀딱 빼놓는 사건 뒤에, 오드리노프는 독일인의 집으로 이사한다. 성실하고, 무난한 독일인의 집 말이다. 예술적 감흥과의 결합(무린의 공간) 뒤에 일상(독일인의 공간)으로의 복귀다. 무분별(까쩨리나) 뒤에 성실함(독일인의 딸)으로의 복귀다.

 

 

"악을 응시하는 동안 작가는 예술적 만족에 빠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게 된다"  

-서머셋 모옴 <달과 6펜스>

 

 

추가///

마치 데이비드 린치 스타일의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