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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소설

도스또예프스끼 <쁘로하르친 씨, 1846>

by R.H. 2018. 6.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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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스찌니야 페도로브나 집의 가장 어둡고 허름한 한쪽 귀퉁이에 세묜 이바노비치 쁘로하르친 씨가 살고 있었다. 그는 나이가 지긋한 사람으로, 사려 깊고 술도 마시지 않는 건실한 사람이었다”

 

 

말단 관리인 우리의 주인공 쁘로하르친 씨는 20년 동안 하숙집에 기거하며, 혼자 사는 중년 남자다. 뭐 긴 말이 필요하겠는가. 사는 모습이 궁상맞고, 구질구질한 건 뻔한 일이다. 이런 그가 안쓰러워서인지 하숙집 여주인은 쁘로하르친 씨에게만 반값 방세 특혜를 주고 있다. 다른 하숙인들은 쁘로하르친 씨보다 두 배가 넘는 방세를 내면서도 미움을 받는데 말이다. 이에 다른 하숙인들은 여주인과 쁘로하르친 씨 사이에  썸씽이라도 있냐며 꿍시렁 거리지만, 그딴 건 없다. 20년 동안 하숙인으로 살면서 방세 한 번 밀리지 않고, 조용히 살아온 쁘로하친에 대한 신용, 동정심, 그리고 약간의 우정이 섞인 것뿐이다.

 

 

여튼 술 먹고 해롱해롱하는 일도 없고, 검소한 삶은 사는 사람. 삶의 루틴이 집-직장-집-직장인 사람.. 재미있는 사람이 아닌 건 분명하다. 매력적인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사실 쁘로하르친 씨는 사회성이 매우 매우 부족한 인간이다. 다른 하숙인들은 월급 날이면 같이 모여 술도 마시고, 푼돈 노름도 하고, 이 얘기 저 얘기 하면서 으싸으싸 한 번씩 하는데, 쁘로하르친 씨는 이들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하숙인들이 일부러 쁘로하르친씨를 따돌리는 건 아니다. 그에게 어떤 적대감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숙인들은 그가 착한 사람이지만, 상상력은 부족하다고 최대한 좋게 평해준다. 쁘로하르친 씨 같은 사람은 그냥 어울리기 힘든 종류의 사람일 뿐이다. 

 

 

“만약 누군가가 자신을 비웃는다거나 충고라도 할라치면 심한 무안을 주는 것으로 끝맺음했다”

 

 

하지만 쁘로하르친씨가 온순하기만 한 사람은 아니다. 그는 절대로 자기 의견을 굽히는 법이 없는 사람이다. 남의 일에 끼어드는 것도 싫어하지만, 다른 사람이 자기 일에 끼어드는 것도 질색하는 사람이다. 누군가의 선의의 충고도 적대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소심한 사람들의 특징이다. 자존심은 높지만, 자존감은 낮은 사람의 전형이다. 사실 우리 대부분이 그러하다. 분명 좋은 충고인 걸 알지만,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해지고, 작은 지적에도 앙심이 생기는 우리… 쁘로하르친씨라고 해서 별다를 바 없다.

 

 

쁘로하르친씨에게는 독일산 자물쇠가 달린 가방이 하나 있다. 그 속을 안 봐도 뻔하다. 그의 구질구질한 삶을 총체적으로 담고 있을 게 뻔하다. 그 사람의 방은 그 사람의 머릿속이라는 말처럼, 이 낡은 가방 안에 들어있는 허접한 잡동사니들은 그의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증거물일 것이다. 타인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습이다. 

 

 

그런데 눈에 띄지 않으려 노력하면, 되려 눈에 더 띄듯이, 그의 가방은 튀어도 너무 튄다. 하여, 지노비라는 옆 방 하숙생은 그 가방 안에 후손에게 물려줄 거라도 숨겨놨냐며, 지나가는 말을 별생각 없이 말한다. 처음에 쁘로하르친씨는 당황해서 어버버 하지만 얼마 후 갑자기 공격적으로 나온다. 지노비가 지난번에 저질렀던 시덥지 않은 실수들을 죄다 끄집어내어 욕을 한다.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라는 추임새를 여기저기 남발한다. 그리고 다섯 시간 동안 드러누워 있다가, 또 지노비를 찾아가 막말을 하고 창피를 준다. 

 

 

“그러고는 3일이 지나, 이미 그 일에 대해 모두 거의 잊어버릴 만했을 때, 마치 결론을 내리기라도 하듯 다시 이렇게 덧붙이는 것이었다. 만약 지노비가 기병이 되고 전쟁터에 나가기라도 하면, 이 나쁜 놈은 다리를 잃을 것이 분명하고, 의족을 달고 와서 ‘착한 세묜 이바노비치 아저씨, 한 푼 도와주세요’.라고 말하게 될 터인데, 그럴 경우 자신은 돈 한 푼 도와줄 리 만무하며, 저런 못 돼먹은 자식은 거들떠보지도 않을 거라는 둥, 저런 녀석은 어쩔 도리가 없는 놈이라는 둥 지껄였다”

 

 

질린다 질려... 정말 별일도 아닌 거에 발끈해서는 막말을 해대고, 잊을만하면 끄집어내서 욕하고,  저주하고... 그야말로 자존감은 낮고 자존심은 높은 사람의 전형이다. 

 

 

이에 다른 하숙인들은 쁘로하르친씨를 골려주기로 결심한다. 딱히 악의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다. 그냥 호기심에, 장난 삼아 생각해 낸 것뿐이다. 하숙집 사람들은 차 모임에서 모두가 공모하여 가짜 뉴스를 퍼뜨린다. 

 

 

관청의 각하께서 말씀하시길, 결혼한 관리들은 안정된 가정생활을 기반으로 훨씬 더 제 능력을 발휘하기에  승진도 잘한다면서, 앞으로 사교성과 호감 가는 매너를 갖지 못한 관리들을 대상으로 특별 교육을 실시할 거란다. 동시에 연차가 오래된 관리부터 순서대로 교양 있는 관리를 육성하기 위한 전 과목 시험을 치게 하는 법이 시행될 것이며, 이 중 몇몇은 사표를 내야 할 상황을 맞이할 것이란다. 그래서 수많은 관리들이 벌써부터 두려워한다는... 가짜 소문을 가지고 하숙인들은 서로 주거니 받거니 놀래는 척도 하고 걱정하는 척도 하면서 쁘로하르친을 겁주는 장난을 치는데…

 

 

“이런 일이 있은 다음부터, 세묜 이바노비치는 지금까지 전혀 상상하기 힘들었던 흥미로운 성격을 보여 주기 시작했다.......(중략) 그는 안절부절못하고, 무엇에 놀란 듯한 사람의 시선을 하고, 뭔가 두려워하고 의심하는 듯한 얼굴로, 서성거리며 돌아다니는가 하면, 무엇엔가 깜짝깜짝 놀라고, 뭔가 엿듣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여기저기 귀를 기울이는가 하면, 급기야 어떤 공포에 휩싸여, 진실을 찾으려고 애쓰는 듯한 모습으로 변해 버렸다”

 

 

한마디로 사람이 헤까닥 해버렸다. 관청에도 쁘로하르친씨가 머리가 돌아버렸다는 소문이 쫘악 퍼지고, 이 소문을 전해 들은 뽀로하르친 씨는 부끄러웠는지 어쨌는지...어느 날 소리 소문 없이 관청을 나가 자취를 감추고, 집에도 들어오지 않는다. 그는 사라져 버렸다.. 그래도 다행이다. 며칠 뒤, 실신한 상태로 어느 마부의 손에 들려 집으로 돌아온다. 계속되는 혼수 상태, 비몽사몽인 상태에서 그는 환상에 시달리고, 헛소리를 해댄다. “밤낮으로 그놈의 화재니 누이니 주정뱅이니 자물쇠니 가방이니…” 하는 소리를 앵무새처럼 해댄다. 

 

 

"나에겐 부양해야 할 누이가 있어. 알아들었어? 누이가 있단 말이야. 이 못 대가리야"

 

 

쁘로하르친 씨는 매달 적은 돈이나마 누이에게 보내고 있었는데, 그는 항상 이를 짜증스러워 했다. 누이를 그저 짐덩이로 생각했고, 누이에 대한 애정이라곤 눈꼽 만큼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쁘로하르친이 나쁜 사람이란 말은 아니다. 왜냐면, 불행하게도 우리 모두 그러하기 때문이다... 가족을 부양한다면서 세상 제일 큰 일 하는 것처럼 떠벌리지만, 그 돈은 하잘 것 없고, 그 감정은 쁘로하르친 씨의 것과 동일하니까.. 가족 간의 사랑, 부성애, 모성애, 형제애.. 이런 건 다 허상이다…

 

 

"헛소리는 멍청이들이나 하는 짓이고, 주정뱅이나 개들이 하는 짓이야.... 너는 빈둥거리고 노는 놈팡이야, 학자인 체하는 너, 말이야, 겉멋으로나 책을 읽는 주제에, 그래, 너 같은 놈은 불에 태워 버려야 해. 머리가 타서 떨어져 나가는 줄도 모를 거야. 그래, 이런 이야기 들어 봤어!"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쁘로하르친 씨는 주변 사람들을 향해 악담을 쏟아낸다. 막말이 태극기 부대급이다. 왜.. 도대체 왜...쁘로하르친 씨는 미쳐버린 걸까. 왜 저렇게 얌전히 살던 사람이 거친 말을 퍼부으며 으르렁거리는 걸까... 실직에 대한 공포다. 하숙인들이 장난 삼아 퍼뜨린 가짜 뉴스에서 언급된 해고의 가능성… 고용불안이 몰고 온 대참사다. 

 

 

"관청은 필요하단 말이야.... 내일까진 필요할지 모르지, 그런데 그다음 날은 필요 없게 될지 누가 안단 말이야? 그런 이야기를 내가 들었다고"

 

 

인간은 큰 일을 당하면 이상한 각성 상태로 돌입하면서 정신 똑바로 차리고 그 상황을 헤쳐나가기도 한다. 그런데 되려 사소하고도 자질구레한 일들은 우리의 신경을 건드리고, 마음을 좀 먹게 만든다. 우리의 정신을 뒤틀리게 한단 말이다. 저렇게 별 것도 아닌 거 가지고, 실직을 진짜로 당한 것도 아니고, 고소당한 것도 아니고, 무슨 대형 사고를 친 것도 아닌데, 왜 저렇게 이상 행동을 보일까... 싶지만, 실직 가능성의 소문만 듣고도 마음이 덜컥하는 게 우리다.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갑자기 소심해질 수 있을까 하고 놀라기도 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소심해졌는가? 큰 직책이라도 갖고 있고, 아내나 자식을 거느리고 있다면 얘기가 달라질 텐데, 또 만약 무슨 사건으로 법정에라도 끌려갔다면 모르겠지만, 이 사람은 완전히 거렁뱅이에다 가진 것이라고는 독일산 자물쇠가 달린 가방 하나가 전부이다. 칸막이 너머에서 20년이 넘도록 죽은 듯이 누워 입도 벙긋하지 않고, 슬픔이니 기쁨이니 하는 것도 모르고 검소하게 살아온 사람인데, 무슨 헛소리를 듣고 갑자기 머리가 돌아 버려, 이 세상에 사는 것이 갑자기 두려워진 것이란 말인가. 다른 모든 사람들도 살기 힘들다는 것을 이 사람은 모른단 말인가....!

 

 

한 걸음 떨어져서 보면 만사가 쉽다. 실직이 기분 좋은 일은 아니지만, '거기 아니면 일할 데가 없는 것도 아니고, 막말로 21세기 한국에서 굶어 죽기야 하겠나, 농사라도 지으면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지, 알바라도 하면 되지, 뭐 그렇게 전전긍긍할 거 있나. 뭐 대단한 밥그릇이라고 지키려고 안절부절못하나, 아니다 싶으면 그냥 걸어 나오면 되는 거지, 왜 자기 돈 쓰고, 시간 버리고, 감정 소비까지 하면서 그 자리에 연연하나'... 이렇게 쉽게 생각한다. 틀린 말도 아니다. 멀리서 보면 이렇게 쉽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당사자의 뇌는 쁘로하르친 씨처럼 이미 쪼그라들었다. 장기를 둘 때, 옆에서 훈수 두는 사람 눈에는 살아날 길이 보이는데, 막상 ‘장군이야!’ 소리 들은 당사자는 길이 보이질 않는다. 순간 심리적으로 위축되면서 뇌도 위축되었기 때문에, 평정심을 가지고 훈수 두는 사람 눈에 뻔히 보이는 살아날 길이, 당사자에게는 보이질 않는 것이다.

 

 

저렇게 미쳐버리고, 혼수상태에 빠져 있던 쁘로하르친 씨는 결국 죽는다. 그런데 반전이다. 지독하게 검소하게 살아 온 사람, 돈 한 푼에 벌벌 떨던 사람...그런데 그의 침대 요 속에는 큰 돈이 숨겨져 있었다. 별의별 진귀한 메달, 금화, 희귀한 지폐도 있었다. 오래된 은화,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의 것, 독일 화폐, 뽀뜨르 대제 시대의 것, 예까쩨리나 여왕 시대의 것도 있었다. 모두 해서 2,497루블이 이다. 그의 한 달 방세가 5루불이었다니...무려 40년치 방세다. 

 

 

왜 쁘로하르친 씨는 이렇게 많은 돈을 모아만 두고, 써보지도 못하고, 이렇게 바보같이 허무하게 생을 마감했을까. 불안했기 때문이다. 그에게 돈은 소비를 위한 것,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심적 평화를 주는 물건이다. 마음에 조그마한 평화를 주는 물건이다. 우리와 다를 바 하나 없다. 노후 걱정에 전전긍긍하며 살아가는 우리 역시 결국은 모아 놓은 돈 다 쓰지도 못하고 죽을 것이다. 왜? 쓰면 불안하니까. 돈을 쓰면 재미있고 신나는 게 아니라, 불안하니까.. 실직에 대한 불안, 노후에 대한 불안. 

 

 

그래서 자본주의는 사람들의 이런 마음을 이용해서 돈을 번다. 이른바 불안 마케팅이다. 기사도 쏟아져 나온다. 노후에 얼마의 돈이 필요하다면서 그 기준이 엄청 높다. 일부로 그러는 것이다. 사람들 불안하라고...쁘로하르친 씨가 하숙인들에게 들은 가짜 뉴스, 바로 그 가짜 뉴스와 같은 것들이다. 

 

 

“나는 이미 죽은 사람이오, 이젠 이미 필요 없는 일이요. 정말, 어떻게 된 일이오! 이렇게 누워 있으니 좋구먼.. 나는 말이오, 내 말 듣고 있소? 내 말은 그게 아니라, 당신은 정말 좋은 여자요. 최고라고. 그러나 이걸 명심해요. 이제 나는 죽었단 말이오. 만약, 그러니까 만약, 내가 죽지 않았다고 치자고. 그렇게 될 리도 없지만, 내가 죽지 않았다면, 말이오. 내 말 듣고 있소? 내가 살아서 일어난다면,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네?”

 

 

쁘로하르친 씨는 죽음 뒤에야, 그 지긋지긋한 불안, 우리를 옥죄는 일상의 불안, 상상의 불안에서 해방되었다. 그리고  그가 간절히 바라던 조용함과 평화를 드디어 얻게 되었다. 아마.. 우리 역시 그렇게 될 것이다..

 

 

추가////

 

어떤 한 남자가 허름한 웃옷의 앞섶을 다 풀어헤치고, 불에 그을린 머리카락과 수염을 산발한 채, 장작더미 위로 올라가면서 세묜 이바노비치를 공격하고 군중들을 선동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점점 더 몰려들었고, 그는 계속해서 소리를 질렀다. 그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절망에 빠진 쁘로하르친 씨가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분노한 군중들은 마치 뱀처럼 그를 에워싸고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해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치다가 잠에서 깨어났다. 

 
쁘로하르친 씨가 실신한 상태, 비몽사몽 한 상태, 혼수 상태에서 보는 환영이다. 이 때의 장면들은 마치 영화 <인셉션>의 꿈 속 장면들을 보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