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외국소설

도스또예프스끼 <가난한 사람들, 1845>

by R.H. 2018. 3. 23.

 

 

 

늙은 남자와 젊은 여자

 

 

<가난한 사람들>은 40대 후반의 하급 관리 마까르와 20대 초반의 젊은 여성 바르바라 간에 주고받는 편지로 구성된 소설이다. 이 둘 사이의 감정은 사랑이 분명한데, 마까르는 부성애라고 우긴다. 누굴 속이려 드는지.. 여튼, 바르바라 역시 마까르에게 친절하고, 호감을 보여주긴 하지만, 마까르의 감정이 더욱 거세고 일방적이다. 그는 그녀에게 생활비만이 아니라, 꽃이며 사탕이며.. 온갖 선물을 다 갖다 바친다. 아이돌 덕질하는 아재 느낌.. 그런데 바르바라가 비꼬프라는 시골 지주한테 시집가버리면서, 소설이 끝나버린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호구 아저씨를 홀딱 벗겨 먹은 여시같은 년의 이야기일까? 아니면, 집도 절도 없는 고아인 젊은 여자애를 어떻게 해보려는 주책맞고 징그러운 늙다리 아저씨의 이야기일까? 도스또예프스끼가 겨우 이런 추잡스런 스토리를 소설이라고 쓴 걸까? 아니다. 표면상의 이런 이야기가 전부라면, 이 소설이 문학일 수 없고, 고전으로 남을 수도 없다. 이런 시시껄렁하고, 홀딱 깨는 스토리 뒤에는 다른 이야기가 있다. 

 

 

등단작이 말해주는 것들..

 

 

<가난한 사람들>은 도스또예프스끼의 등단작인데, 그는 자신의 등단작을 편지 형식으로 내보였다. 편지, 그것은 사적인 일기와 공적인 글쓰기 그 중간에 위치한 글쓰기 형태다. 일기는 의도치 않게 공개되는 경우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자신만 보기 위한 글쓰기다. 지극히 사적이고, 지극히 내밀하다. 그런데 편지는 타인에게 읽히기 위해 써진 최초의 글쓰기다. 수많은 대중에게 보이는 공적 글쓰기는 아니지만, 어쨌든 타인에게 읽히기 위한 글쓰기다. 그러니까 등단작, 즉 타인에게 공개되는 최초의 소설을 편지 형식으로 했다는 것은 참 절묘한 설정이다.

 

 

또한, 등단작은 작가의 출사표다. 즉, 등단작에는  '나는 왜 글을 쓰는가' 그리고 '나는 앞으로 무엇을 쓸 것인가' 가 담겨있다. 그렇다면, 도스또예프스끼가 밝힌 '나는 왜 글을 쓰는가'는 무엇인가? 작가는 문학을 열렬히 숭배하기 때문에 글을 쓴다고 말하고 있다. 마까르는 도스또예프스끼의 구질구질한 일상이고, 과거다. 그래서 늙은이로 표현되었다. 반면에 바르바라는 도스또예프스끼의 문학이고, 미래다. 그래서 젊은이로 표현되었다. 이렇게 보면, 바르바라를 향한 마까르의 일방적인 헌신과 동경은 작가로 등단하기 바로 직전의 도스또예프스끼가, 구질구질한 일상을 견뎌내는 도스또예프스끼가,  문학을 열렬히 숭배하고, 동경한 것이 된다. 

 

 

그리하여 마까르는 열심히 글을 쓴다. 그의 직업도 글을 쓰는 일이다. 그런데 창조적 글쓰기가 아니라, 관청에서 서류를 깨끗하게 옮겨 쓰는 정서 일을 하고 있다. 마까르는 편지를 끊임없이 보내면서 자신의 문장력이 형편없다고도 하고, 문체가 점점 나아지고 있다고도 한다. 연애편지에 쓸 법한 내용은 아니다. 즉, 마까르(등단을 준비하는 도스또예프스끼)는 편지라는 이름의 습작을 쓰면서 글쓰기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재미있는 점은, 바르바라는 마까르의 시시껄렁한 선물들에는 모두 좋다 좋다 해주는데, 마까르가 보낸 책에 대해서만큼은 대단히 까다롭다는 점이다. 특히 마까르의 이웃에 사는 라따자예프가 쓴 소설에 대해서는 매우 가혹한 비평을 한다. 라따자예프는 하급 관리인데 부업으로 작가 일을 한다. 대중소설, 로맨스 소설을 내놓은 삼류 작가인 듯하다. 그러면서, 바르바라는 라따자예프의 작품을 높게 평가하는 마까르를 실망스러워한다. 그런데 마까르는 라따자예프가 "사리 분별 정확하고 재능도 갖춘 사람" 이라며 글솜씨와 문장력도 훌륭하다고 극찬을 하고, 바르바라의 혹평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바르바라가 감정이 메말랐던 순간에 그의 책을 읽었을거라면서 바르바라를 비난하기까지 한다. 마까르의 문학 수준을 알만 함..

 

 

그러면 바르바라의 문학 수준은 어떠한가? 마까르의 글보다 월등하다. 편지만 오가는 이 소설 사이에 바르바라가 마까르에게 건네준 노트의 내용이 삽입되어 있는데, 군더더기 하나 없이 물 흐르듯 매끈하게 서술된 이야기다. 편지들, 특히 마까르가 보낸 편지들의 장광설과 매우 대조적이다. 편지들이 열에 들뜬듯하다면, 바르바라의 노트는 차분한 어조로 서술되어있다. 바르바라의 노트에 적힌 내용은 상당수가 가난과 죽음에 대한 것으로 우울한 이야기다. 아버지의 죽음, 첫사랑의 죽음, 어머니의 죽음.. 게다가 별 내용은 없으면서 중언부언하고, 정신없고, 과장된 감정으로, 격정적으로 펄쩍펄쩍 뛰는 느낌인 편지의 어조와 달리, 바르바라의 노트는 단정하고 차분하다. 

 

 

이것은 도스또예프스끼가 앞으로 '무엇을 쓸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앞으로 도스또예프스끼가  써낼 이야기의 두 가지 톤을 이 소설에서 소개한 것이다. 편지의 어조처럼 머리를 쥐어뜯으며 신경 줄이 끊어질 것 같은 과장된 감정들의 나열.. 그리고 바르바라의 노트처럼 슬픔으로 짓누르는 듯한 차분한 감정들의 나열.. 

 

 

소설의 결론에 대해..

 

 

그렇다면, 바르바라가 시골 지주와 결혼한 결론은 어떻게 봐야 할까? 이수일과 심순애적 결론으로 봐야 할까? 아니다. 약간 비약이긴 하지만, 시골 지주 비꼬프는 출판업자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바르바라는 문학을 상징한다. 그러니까 비꼬프와의 결혼은 작가와 출판사 간의 계약이다. 비꼬프가 좀 거칠고 상스러운 면이 있기는 하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다. 사실 비꼬프는 바르바라의 첫사랑이었던 뽀끄로프스끼가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을 때, 금전적으로 후원해주었던 사람이다. 친척도 아니고, 친분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리고 뽀끄로프스끼는 바르바라에게 문학적 신내림을 내려준 사람이다. 

 

 

"책과 종이, 그게 다였다! 그때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울분 같은 어떤 기분 나쁜 감정이 나를 감쌌다....그는 많이 배운 사람이었고, 나는 어리석은 아이였다. 아는 것도 없었고, 책은 한 권도 읽은 적이 없었다... 나는 책의 무게로 인해 금방이라도 꺾어질 듯 휘어 있는 기다란 선반을 부드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화가 났고 슬펐다. 어떤 광기 같은 것이 나를 엄습해 왔다. 나는 그의 책을 마지막 한 권까지 전부 다 읽고 싶었다"

 

 

어린 바르바라가 뽀끄로프스끼의 방에 있는 책들을 보는 순간 느꼈던 그 '광기'... 그녀의 첫사랑 상대는 보꼬로프스끼, 아니 책이다. 그녀는 그의 책을 광적으로 사랑했던 것이다. 

 

 

그래서 마까르와 바르바라는 함께 할 수 없다. 과거를 상징하는 마까르와 미래를 상징하는 바르바라가 헤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과거와 미래와 한 공간에 있을 수는 없으니까.. 소설 속에서도 이 둘이 종종 만났다는 언급은 있지만, 실제로 만나는 직접적인 장면은 아예 없다. 이 둘은 마당을 사이에 두고 사는 이웃인데 말이다. 

 

 

아멜리 노통브의 <생명의 한 형태>도 이처럼 편지 교환이라는 구성 방식으로 같은 이야기를 했다. <생명의 한 형태>에서 역시 작가와 팬 간의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현재의 작가는 아멜리 노통브이고, 팬은 작가의 과거이기에, 이들은 만날 수가 없는 것이다. (2000년대를 살아가는 동시대인이 내놓은 <생명의 한 형태>가 발랄하고 심플하며 선명하게 표현되어 있어서, 이걸 먼저 읽는다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이해가 더 빠를 듯)

 

 

이제 문학(바르바라)는 출판업자(비꼬프)와 계약(결혼)을 한 것이다. 그리하여, 도스또예프스끼의 등단작 <가난한 사람들>이 세상에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