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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1

달려라 자전거 (2008) : 텁텁한 시대의 청춘

by R.H. 2010. 6. 8.


<스포일러 주의>

일제시대, 전쟁의 시대, 군부독재 시대.. 그 시대 청춘들은 독립을 소망하고, 가난에서 벗어나길 열망하고, 자유를 갈구했다. 때론 분노하고, 때론 극악스럽고, 때론 억척스러운 모습으로.. 어쨌든 그 시대를 표현하는 단어들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과연 2000년대를 살아가는 청춘들에게 이 시대는 어떤 단어로 압축될까?

과거보다 잘 살고, 더 많은 자유를 누리는 이 시대.. 그런데 왜 그 지지리 궁상맞던 과거보다 자살률은 2배가 넘는 걸까? 얻은 것이 분명 더 많은 시대인데, 무언가를 상실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건 왜일까? 더욱더 답답한 것은 뭘 상실했는지조차 정확히 모른다는 것이다. 이 애매모호한 시대, 밍숭맹숭하고 텁텁한 느낌의 시대, 밥 못 먹어 굶어 죽는 일은 없지만, 뭔지 모르는 무언가에 굶주린 상실한 시대..

수욱(이영훈)은 바로 이 시대 청춘의 모습이다. 그는 일정 직업 없이, 헌책방에서 아르바이트 한다. 그는 불친절하고 무뚝뚝하다. 그렇다고 신경질적이거나 냉소적인 건 아니다. 세상에 불만 가득한 인물도 아니다. 어딘가 모르게 맥 빠지는 인물이랄까.. 희망적이지도 않고, 억척스럽지도 않고.. 텁텁한 시대를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텁텁한 청춘..

고즈넉한 헌책방에서 조용히 일하는 허우대 말끔한 분위기 있는 청년. 하지만 이는 함정이다. 현실에서 저런 청춘은 흔한 말로 루저다. 하정(한효주) 친구의 말마따나 그의 인생이 풀릴 확률은 987분에 1인 것이다.

게다가 그는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마치 그가 깨진 안경을 벗어버리지 못하는 것처럼.. 식물인간이 돼버린 여자친구에게 가지고 있는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답답한 현실을 사는 그의 취미는 경마다. 그는 경마장에서 "스노우 퀸" 이라는 말에 돈을 건다. 그런데 이 말은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단다. 다른 말에 비해 체구도 작고, 발목도 가늘어서 누가 봐도 이길 수 없는 말이다. 그럼에도 그는 스노우 퀸을 응원한다. 그가 한탕을 꿈꿔서 그런 건 아니다. 그는 가장 별볼일 없는 말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다. 자기 자신을 응원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해피엔딩이다. 몇 년이 지나 스노우 퀸이 이기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 하정과 수욱은 그들이 꿈꾸던 멋진 세계여행을 한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해피엔딩도 아닌 듯 하다. 이 청춘들이 갑갑한 현실을 벗어나게 된 것은 흔치 않은 "기적" 이 일어났기 때문이니까. 그들에게 987분에 1의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여전히 텅 빈 눈빛을 한 채 구질구질한 현실에 붙들려 있어야 했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