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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1

라이언 일병 구하기 (1998) : 객관의 눈을 가장한 왜곡된 시선

by R.H. 2010. 4. 5.




펄럭이는 거대한 성조기가 스크린을 꽉 채우면서 영화는 시작한다. 미국이 참전한 2차 대전을 소재로 한 영화에서 이런 첫 장면이 문제될 건 전혀 없다. 제 3자의 눈에 거슬리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영화 내용은 소박하다. 세 아들을 전장에서 잃어버린 어머니의 슬픔, 그리고 이 어머니에게 남은 마지막 아들을 집으로 돌려 보내기 위한 임무수행을 그린 영화다. 전쟁의 정당성이나 사상, 이념을 이야기 하는 게 아니라 휴머니즘의 시각으로 전쟁을 그려내겠다고 확실히 한 것이다.

물론 이 영화에서도 독일군은 천하에 비열한 놈이다. 목숨을 구걸하며 애걸하는 추잡한 독일군.. 이를 불쌍히 여겨 살려 보냈더니, 탱크 끌고 나타났다. 게다가 미군 가슴에 단검을 지그시 찔러 넣는 모습이란.. 뭐 2차 대전을 소재로 한 거의 대부분 영화가 독일군을 이렇게 그려내니 이것도 문제될 건 없다.

그리고 이 은혜를 원수로 갚은 사악한 독일군을 총으로 쏜 것은 마음 여린 미군 통역병이었다. 그 독일군에게 인간적으로 대하고, 살려 보내자고 주장한 바로 그 어리버리 통역병 말이다. 적에게 동정심은 절대 금물이라고 말하는 듯 하다. 뭐, 지극히 현실적이다. 이것도 문제될 거 없다.

그런데 어딘가 모르게 자꾸만 언짢은 것은 왜일까.. 어쩌면 스티븐 스필버그가 "태양의 제국" 에서 그린 일본 군인의 모습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영화를 하도 오래 전에 봐서 내용이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분명 그 영화에서 소년 일본병에 대한 묘사는 인간적인 연민으로 가득했다.

이게 꼴 비기 싫었던 것이다. 남에게는 "오른쪽 뺨을 맞으면, 왼쪽 뺨을 내밀라." 고 말하면서, 정작 자신은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의 논리로 대응하는 듯 해서 말이다. 그런 사람 있지 않은가. 얻어 터진 사람에게 참는 자에게 복이 있다느니, 용서와 화해를 실천해야 한다느니.. 오만 착한 척을 다하면서, 정작 자신이 한 대 맞으면, 손에 도끼 들고 달려드는 사람..

오해 말라. 태양의 제국에서 일본군을 연민의 눈으로 묘사해서 거슬리는 게 아니라, 스필버그가 가지고 있는 이중잣대, 즉 짐짓 객관적인 척, 휴머니스트인 척 하면서, 왜곡된 시선을 가지고 있는 게 꼴 비기 싫다는 거다. 남 일에는 적을 용서하고 이해하는 휴머니즘을 이야기하면서, 자기 일에는 적은 반드시 찢어 죽여야 한다는 그 논리 말이다.

내가 "태양의 제국" 을 못 봤다면, "라이언 일병 구하기" 를 매우 긍정적으로 봤을 것이다. 흔히 전쟁영화에서 보여주는 대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은 당연하다는 식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 목숨을 두고 숫자놀음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이 부분에서 이 영화는 매우 훌륭하다. 하지만 어쩐다. 내가 중딩때 비디오로 빌려본 그 케케묵은 영화가 자꾸만 기억나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