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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소설

이청준 단편 <줄뺨, 1974>

by R.H. 2016. 8. 29.

 

 

집단을 가장 손쉽게 장악하는 방법은 체벌, 기합이다. 그리고 체벌에서 가장 초보적인 수준의 방법은 망신주기다. 망신 당하지 않기 위해 힘 가진 자의 명령에 복종해야함을 배우는 것이다. 망신 당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지켜보는 사람에게도 가르침을 준다. 넌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저기 저 망신 당하는 사람이 무고하고 억울하고 비합리적인 이유로 망신 당하고 있지만, 넌 이 상황을 바꿀 수 없다. 네가 할 수 있는 건 괴로워하고 굴욕감을 느끼는 것 뿐이다... 힘있는 자의 망신주기는 억압 당하는 자에게 무력함과 굴종을 가르치는 것이다.

 

망신주기 체벌이 먹혀들어가지 않을 경우엔, 좀 더 쎈 체벌이 있다. 낙오자, 패배자를 만들기다. <줄뺨>에선 연병장 돌기가 그 방법이다. 허약한 자들은 연병장을 돌다가 낙오한다. 트랙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강한 체력과 의지를 가진 자들은 목표치를 채운다. 강한자에게는 자부심을, 낙오자에게는 열패감을 안겨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체벌이 먹혀들어가지 않는 경우가 생기기 시작한다. 이 체벌 방식은 낙오자가 점점 더 늘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나만 탈락되면 부끄럽고 챙피하고 심한 열등감에 휩싸인다. 헌데 너도나도 다 같이 낙오자가 되면, 이상한 안도감이 생긴다.

 

그래서 권력자는 이제 세련된 체벌을 사용해야 한다. 선착순 경주 기합이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깃발 꽂힌 곳까지 왕복 시합을 해서, 1등이 되면 경주에서 빠지는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계속해서 이런 식의 경주를 하는 것이다. 

 

"선착순 경주에서 기합을 일찍 끝내는 녀석들은 그렇지 못한 녀석들보다 어느 의미로 그 경쟁 심리나 이기심이 강한 자들이었다. 그리고 그 전반에서 자기 기합을 끝내지 못하는 녀석들이란 대개 남보다 몇 곱절 고통을 당하면서도, 기합을 이미 끝낸 자들보다는 아직도 그것을 계속하고 있는 자의 수가 많으며 자신은 그 다수의 집단에 속에 속해 있음을 차라리 마음 편하게 생각할 정도로 심지가 허약한 자들이었다."<본문 발췌>

 

처음에 몸은 너무도 힘들지만, 너도나도 낙오자니까, 낙오자들끼리 계속 달리니까,  다수에 속해 있다는 안도감에 견딜만 했다. 근데 이 경주가 지속되면서 점점 낙오자 숫자는 줄어든다. 육체적 고통보다 견디기 힘든 정신적 압박감과 열패감, 그리고 불안과 초조가 몰려든다. 이쯤 되면, 말 안듣는 인간들을 어지간해서 다 휘어잡을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세련된 방법도 먹히지 않는 강한 저항 집단도 있다. 여기엔 또 극약 처방이 하나 남아 있다.

 

서로 마주보게 세워 놓고 반성의 시간을 가지라면서, 서로 뺨을 한대씩 치게하는 것이다. 첨에는 쭈뼛쭈뼛한다. 살살 상대 뺨을 스치듯 손을 댄다. 살짝 때리기 시작한다. 어라.. 감정이 실렸는데? 이제 그 때림의 강도는 올라간다. 뺨을 때리다 못해, 주먹이 오가고, 발길질을 하고, 바닥에 나뒹군다. 이제 더이상 권력자의 목소리는 들려오지도 않는다. 서로의 주먹질, 발길질, 욕설만이 미친 듯이 오고간다.

 

가해자를 피해자로 만들고, 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드는.. 우리가 전통적으로 이이제이라고 했던 그것. 약자들끼리 서로 물고뜯고 싸우고, 욕하고..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고, 모두가 모두를 증오하는 그것.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증오의 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