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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소설

이청준 단편 <숨은 손가락,1985 > <가해자의 얼굴, 1992>

by R.H. 2016. 8. 30.

 

 

<숨은 손가락, 1985>

"자신의 죽음을 고발로 모면"한 동준은 가해자이자, 피해자다. 이 더러운 세상이, 이 지옥같은 전쟁이, 끔찍한 이데올로기가 그를 이렇게 몰고 갔다, 악마같은 그들이 덫을 놓고, 그를 함정에 빠뜨렸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 이해가는 말이지만, 옳은 말은 아니다. 이해받을 수 있다 하여, 무죄는 아닌 것이다. 내 목숨을 구걸하고자, 타인을 지목한 이 더러운 손가락이 내 몸에 붙어있는 한, 영원히 죄의식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신 역시 가해자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스스로 고백하지 않는다면, 그 추악한 손가락을 잘라내지 않는다면.. 결국 그에게 남은 것은 죽음 뿐이다.

 

 

<가해자의 얼굴, 1992>

북쪽 사람에게도 남쪽 사람에게도 쫓기는 사람. 좌에서도 우에서도 죽이려드는 사람. 그 사람이 소년의 자형 소식을 알려준다면서, 소년의 집에 남몰래 들어왔다. 누가 볼까 무섭다. 날이 새기 전에 이 남자가 어서 나가주었으면 좋겠건만.. 그는 계속 말을 이어간다. 굼뜬 모습, 무언가를 듣고 싶어하는 태도, 갈망하는 눈빛.. 

 

그는 결국 소년의 집을 나선다. 어디에도 숨을 곳 없는 그 남자, 그에게 거리는 곧 죽음의 길이다. 소년은 알고 있었다.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가 왜 중언부언 말을 늘려나갔는지. 하지만 소년은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다. 우리집에 숨어 있으시오.. 라는 그 간단하면서도 무거운 말을..

 

전쟁이라는 끔찍한 상황 속에서 갓 중학생이 된 어린 소년에게 너무도 버거운 일이었다. 소년만이 아니라, 그 누가 과연 저 청년을 숨겨줄 수 있을까.. 사냥꾼에 쫓기는 사슴을 숨겨주는 나뭇꾼의 이야기가 대대손손 전래되는 이유는 이 행위가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다. 멀리서 보면, 간단하지만, 가까이에서는 무거운 이 행위를 우리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나약함, 비겁함.. 소년은 전쟁의 피해자다. 동시에 가해자가 되어버렸다. 그 청년을 죽음의 거리로 내몬 소년의 침묵. 이것은 그를 한평생 "성장을 멈춘 채 마냥 문 밖에 떨고 서있는 그 아이" 로 만들어버렸다.

 

그는 스스로를 피해자라고 여겼다. 그 자리가 편하고 안락하기 때문이다. 전쟁이, 상황이, 살기 위해 그랬다, 나 역시 피해자다, 라는 그 속편한 말들 속에 자신을 숨겨두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스스로의 가해 행위를 고백한 순간 그는 성장한다. 아니, 늙어버린다. 소년이 시간을 건너뛰어 순식간에 노인으로 변해버린 모습을 지켜보는 그의 아내는 마음 속으로 슬퍼한다. 그가 겪은 한평생 겪은 고통과 고뇌를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 부끄럽고 참담스런 허물의 값을 끝내 가해자의 자리에서 치르고 싶어하는 질긴 속죄의식"

 

스스로가 가해자라는 것을 인식하는 용기, 속죄를 바라는 마음.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부끄러워" 하는 그 마음. 그리고 나도 피해자라는 편하디 편한 말 속에서 벗어나오려는 마음.. 이런 마음을 가질수만 있다면, 인간에게 희망은 있을 것이다. 우리에겐 희망이 있을 것이다.

 

추가///

<숨은 손가락>에서 가해자이자 피해자인 동준은 끝까지 자신의 가해 사실을 부인함으로써 자살에 이를 수 밖에 없었다. 반면에 <가해자의 얼굴>에서 가해자이자 피해자인 김사일은 자신의 가해 사실을 고백함으로써 미래라는 희망의 씨앗을 뿌린다.

 

"오늘 이 언쟁이 어떤 식으로 끝나든 승리는 어차피 네 것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니까. 앞으로의 세상은 결국 너의 젊은 세대의 것이니 그런 뜻에서 너는 애당초 이 애비에 대해 승자로 태어난 것 아니냐...인생사엔 언제나 뒤에 오는 자가 진정한 승자가 되어야 하겠기게 하는 소리다." <가해자의 얼굴,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