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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소설

박완서 단편 <꿈꾸는 인큐베이터, 1991>

by R.H. 2016. 10. 13.

 

 

 

 

주인공은 남 보기에 그럴듯한 삶을 산다. 중소건설업체 사장의 부인, 세 아이의 엄마, 별문제 없는 평온한 가정의 전업주부. 그야말로 바른 생활 교과서에 나올법한 전형적인 도시 중상층 가정이다. 

 

 

그녀가 요즘 즐겨보는 영화는 <장미의 전쟁> 이다. 아침 드라마같은 부부싸움이 주된 내용인 막장 드라마다. 딱, <사랑과 전쟁> 과 같은 류의 이야기다. 증오로 얼룩진 부부 싸움. 그 싸움의 원인은 별 것도 아닌.. 이런 시시껄렁한 막장 드라마는 그녀에게 은밀한 즐거움과 카타르시를 주고 있다. 그런데 그녀는 왜 이런 증오의 이야기, 가정 파괴 이야기에  매료되었는가. 자신 안에 켜켜이 쌓인 증오 때문이다.

 

 

"하늘 무서운 일이었습니다. 실패할 리 없는 방법이라는 게 여야 살해를 전제로 했으니까요. 치밀하고 계획적이고 과학적이고 감쪽같이 태아가 단지 여아라는 이유만으로 없애버리는 겁니다." -본문 중-

 

 

그녀는 두 딸을 낳은 뒤, 세 번째 태아는 성별을 감별하여 낙태했다. 아들 타령해대는 시어머니의 성화, 거드는 시누이, 그보다 더 혐오스러운 것은 뒷짐진 채 방관하는.. 그러나 무언의 압박을 가하는 남편이다. 영화 <장화 홍련> 에 나오는 그 아버지의 모습이다. 가정 파괴의 실질적 원인, 그러나 나는 모르쇠로 일관하는 태도. (좀 다른 얘기지만, 방관자 빌라도가 사도신경을 통해, 수천년간 그것도 매주 수억명의 기독교인들의 입을 통해 저주받고 단죄받는 것은 나름 타당하다는 생각도 든다. 방관자야말로 어쩌면 가장 큰 악인일테니..)그리하여 그녀는 살인자가 되었고, 남편은 공범자가 되었다. 

 

 

그런데 그녀가 낙태, 그 자체에 펄펄 뛰는 건 아니다. 그녀는 사실 한참전에 낙태를 한 경험이 있다. 남편이 실직 상태였고, 자신이 임시직으로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난의 공포로 가득 찬 시기에, 불가피하게 낙태를 했던 것이다. 그때라고 해서 낙태가 아무렇지 않았던 건 아니다. 과히 기분 좋은 경험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는 어쨌든 그녀 자신의 의지가 반영된 행위였다.

 

 

그런데 두 번째 낙태의 경우에는 그녀 자신의 의지가 완전히 배제된 채, 주변 인물들에 의해 살인자가 될 것을 강요받았다. 바로 이게 문제다. 그들은 그녀를 같은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몸에 대해 주체적 권리가 없는 인큐베이터였을 뿐이다.

 

 

하여 그녀는 이제 단호하게 말한다. 앞으로는 달라져야 한다고.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해 어떡해서든 달라져야 한다고.. 자신의 집을 뒤로 한 채 달려가는 그녀는 과연 유턴 지점을 찾았을까.. 찾았을 것이다. 분명 찾았을 것이다..

 

 

"어딘가에 유턴 지점이 있겠지. 유턴 지점을 찾는 것도 아니면서 그렇게 믿으며 상쾌한 속도를 냈다. 도시와 더불어 내 집 또한 뒤로 뒤로 멀어져 가는 기분 또한 상쾌했다." -본문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