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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소설

박완서 단편 <환각의 나비>

by R.H. 2016. 10. 23.

 

 

 

어머니는 아들네 집에 가고 싶다. 옛날 사람에겐 아들만이 자식이다. 제아무리 딸과 사위가 정성을 들여도, 외손주들이 살갑게 대해도 그녀에게 딸네 집은 남의 집이다. 어머니에게 있어, 딸네 집에 산다는 건 남의 집에 얹혀사는 천덕꾸러기라는 의미다. 어머니는 하여 자기 집, 즉 아들네 집으로 가고 싶다. 

 

 

그러나 치매 증상을 보이는 어머니를 며느리가 달가워할 리 없다. 치를 떠는 며느리와 귀찮아하는 아들.. 이들의 냉정한 태도에 맏딸은 어머니를 모셔오지만, 결국 어머니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어쩌겠는가.. 옛날 어머니에겐 아들만이 자식인걸.. 교묘한 형태로 어머니는 자식에게 버림받았다.

 

 

"그 집에는 느낌이 있었다." -본문 중-

 

 

위성 도시의 재개발 지역, 도시 속에 섬처럼 떠 있는 동네에 버려진 집이 하나 있다. 이 집은 도사의 집이 되었다, 점집이 되었다, 이제는 신도 없는 절집이 되었다. 이 집에는 마금이라는 젊은 여자가 살고 있다. 그녀는 이 집에서 식모였다가, 처녀 도사였다가, 이제는 비구니가 되었다. 

 

 

그리고 뭐를 했든지 간에 그녀는 이 집의 돈줄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성폭행당한 마금이를 이용해 이 집을 얻었고, 마금이가 점을 쳐서 번 돈으로 자신은 좋은 집에 살면서, 막상 돈 버는 딸은 이 괴랄한 집에 내팽개쳐놓는다. 엄마는 이 집에서 만들어진 음식까지 죄다 챙겨가면서, 딸이 행여 좋은 것이나 먹을까 싶어 고기 먹으면 신기 떨어진다는, 소름 끼치는 말도 잊지 않는다. 이 희한한 엄마를 과연 엄마라고 부를 수는 있는 걸까. 포주와 다를 게 뭔가. 하긴 포주들도 엄마라고 불린다 하니..

 

 

아무거나 대충 먹으며 끼니를 때우는 마금이의 집에, 낯 모를 할머니가 어느 날 갑자기 마치 제집인 양 스스럼없이 들어온다. 원래 그 집에 살던 사람마냥 나물을 씻고 다듬고 밥을 짓고 빨래를 하고.. 

 

 

할머니가 차린 상에 두 사람은 정답게 겸상을 했다...누가 손님인지 헷갈리게 하는 할머니였다. 하긴 들어올 때부터 할머니는 자기 집에 들어오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굴었으니까... 다음 끼니 걱정까지 하는 할머니를 보면서 그녀는 슬그머니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졌다. 그런 느낌 또한 처음이었다. 그녀는 남한테 위함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좋은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현실감없이 황홀했다. -본문 중-

 

 

도대체 가족이란 뭘까. 어떤 집은 자식이 부모를 착취하고, 어떤 집은 부모가 자식을 착취한다. 사실 세상 모든 집구석 부모 자식간은 착취 관계다. 물질적으로만이 아니라, 감정적으로도.. 사이좋고 다정스런 부모 자식 간도 그 실체는 감정의 착취니까..

 

 

여튼 가족에게 착취당하지만 그 가족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가여운 소녀와 가족에게 짐덩이 취급당하는 천덕꾸러기 노인이 이렇게 만났다. 그리고 서로가 누구인지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이 두 여인은 아무것도 묻지 아니하고 일상을 공유하기 시작한다. 

 

 

마주 앉아 밥을 먹고, 빨래를 하고, 더덕을 다듬고.. 아, 이 하잘것없는 행위들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 단순한 보듬음은 정녕 현실에서 존재할 수 없단 말인가.. 환상 속에서만 가능한 것인가...

 

 

부처님 앞, 연등 아래 널찍한 마루에서 회색 승복을 입은 두 여자가 도란도란 거리면서 더덕껍질을 벗기고 있었다. 더할 나위 없이 화해로운 분위기가 아지랑이처럼 두 여인 둘레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몸집에 비해 큰 승복 때문인지 어머니의 조그만 몸은 날개를 접고 쉬고 있는 큰 나비처럼 보였다. 아니 아니 헐렁한 승복 때문만이 아니었다. 살아온 무게나 잔재를 완전히 털어버린 그 가벼움. 그 자유로움 때문이었다. 여지껏 누가 어머니를 그렇게 자유롭고 행복하게 해 드린 적이 있었을까. 칠십을 훨씬 넘긴 노인이 저렇게 삶의 때가 안 낀 천진 덩어리일 수가 있다니. 암만 해도 저건 현실이 아니야. 환상을 보고 있는 거야. 영주는 그래서 어머니를 지척에 두고도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그녀가 딛고 서 있는 것은 현실이었으니까. 현실과 환상 사이는 아무리 지척이라도 아무리 서로 투명해도 절대로 넘을 수 없는 별개의 세계니까. -본문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