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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리뷰/로스트

로스트 3-17 Catch : 희생정신을 시험 받다.

by R.H. 2009. 8. 26.

 

<스포일러 주의>

 

섬 밖에서의 이야기

 

데스몬드는 침묵수행 기간을 거친 뒤, 수도승이 되었다. 그는 수도원에서 포도주 만드는 일을 돕고 있는데, 그 포도주 이름이 "Moriah" 라는 사실에 호기심을 보인다. 이제 데스몬드와 신부와의 대화를 들어보자.

 

 

 

신부 : "모리아" 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라는 시험을 받았던 산이지요.
데스몬드 : 그곳은 축제의 장소로는 적합 지는 않은 것 같은데요.
신부 : 하지만 신은 이삭을 살려주셨습니다.

데스몬드 : 하지만 어떤 이들은 신이 애당초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희생시킬 것을 명할 필요 없지 않냐고 하기도 하지요.
신부 : 글쎄,그렇다면 그것을 시험이라 할 수 없지 않나요? 형제님은 희생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는 것 같군요.

 

위의 대화는 이번화의 총체적 압축이다. 이번화에서 말하고 싶은 단어들이 모두 나온다. 시험과 희생, 그리고 108.. 신부가 말하길 포도주는 108박스만 만든단다. 왜 하필 108박스인가? 100박스도 아니고 120박스도 아닌 108 박스. 108은 바로 데스몬드의 운명을 표현하는 숫자다. 이 지긋지긋한 108 이라는 숫자는 데스몬드의 미래이며, 소명이고, 운명이다.

 

그런데 수도승이 되면서 약혼녀와 파혼한 데스몬드는 정신이 흐트러져 있다. 그리고 이런 그의 모습을 본 신부는 데스몬드를 파문한다. 데스몬드의 행동이 파문 당할 정도는 결코 아닌데 말이다. 이상한 일이다.

 


그리고 수도원을 떠나는 데스몬드는 마지막으로 신부의 사무실에 들렀다. 이때 카메라가 들이댄 곳은 신부 책상 위에 놓여있는 사진 한 장이다. 놀랍게도 그 사진 속에는 신부와 어느 백발의 아줌마가 있다. 이 아줌마는 데스몬드 운명의 안내자로 3-8 에피에서 등장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신부가 데스몬드에게 한 모든 말과 행동은 의도된 것이라는 뜻이다. 신부 역시 백발의 아줌마처럼 데스몬드 운명의 안내자였던 것이다. 백발 아줌마는 데스몬드가 운명의 경로를 이탈하려고 할 때 나타난 안내자라면, 신부는 데스몬드가 운명의 경로로 들어가도록 안내하는 사람인 것이다.

  

이제 데스몬드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의 경로로 들어갈 것이며, 그 운명 속에서 희생정신을 시험 받을 것이다. 그리고 신부는 데스몬드를 이 운명의 길로 은근슬쩍 인도했다. 신부가 인도한 그 길의 첫 만남은 바로 페니다.

 

섬 안에서의 이야기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에서 시험 받은 것처럼 데스몬드는 섬에서 시험을 받고 있는 걸까? 이와 유사한 일이 로크에게도 있었다. 로크는 예지몽에서 분이 피 흘리는 것을 보고도 분을 희생양 삼아 해치를 열려고 했다. 이때 로크는 자신들이 시험 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로크의 예지몽에서 피 흘리는 분]    [데스몬드의 예지에서 피 흘리는 찰리]

  

데스몬드는 로크와 유사하게 그의 예지 능력을 통해 찰리가 죽는 것을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찰리를 그 위험 속으로 끌어들인다. 자신의 사랑인 페니를 만날 것을 고대하면서...

  

그런데 이번에도 데스몬드는 찰리의 목숨을 구해준다. 그는 이번에도 희생을 요구하는 섬의 시험에서 낙오한 것인가? 찰리를 구해줌으로써 상자 속 그림이 바뀐 걸까? 헬기에서 탈출해서 낙하산을 타고 내려온 여자의 헬멧을 벗겼을 때, 데스몬드가 고대하던 페니가 아닌 낯선 여자다.

 

신이 우리에게 희생을 요구하는 이유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어떤 의미였을까?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을 때 그의 나이가 100세라고 했다. 아브라함이 늘그막에 낳은 유일한 적자 아들. 세상의 그 어떤 금은보화, 명예와도 바꾸지 못할 소중한 금지옥엽 아들. 한마디로 이삭은 아브라함의 삶, 그 자체다.

 

신은 아브라함의 삶을 송두리째 희생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왜? 단지 신에 대한 믿음을 확인하기 위해? 물론 신에 대한 믿음을 확인하기 위함이라는 말도 맞다. 하지만 신이 아브라함에게 그의 삶의 전부인 이삭을 희생시킬 것을 요구한 것은 단순히 믿음에 대한 시험만은 아니다. 당시 아브라함은 자기 민족의 리더였다는 점에 주목해 보자. 신이 아브라함에게 요구한 것은 리더의 덕목, 즉 희생정신이다.

 

로스트에서는 리더의 덕목에 대해 자주 나온다. 이번화에 나온 희생정신 역시 리더가 갖추어야 할 덕목을 표현하고자 했던 것 아닐까? 집단을 위해, 인류를 위해 앞장서는 리더에게 요구되는 희생정신 말이다.

  

데스몬드가 108분마다 버튼을 누르는 희한하고도 지긋지긋한 일을 무려 3년간 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데스몬드가 들은 이야기는 버튼을 누르지 않으면 지구가 망한다는 밑도 끝도 없는 황당한 말 한마디 뿐이었다. 당신이라면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희생시켜가면서까지 근거 없는 소리를 듣고 그 이상한 일을 하겠느냐는 말이다. 데스몬드는 했다. 지구 멸망이라는 황당무계한 근거 없는 소리에 자신의 삶을 통째로 희생하고 어이없어 보이는 일을 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말이다.

 

때론 내가 희생하는 게 남을 희생시키는 것보다 속 편하기도 하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희생시키는 것보다 아브라함 자신을 번제 하라는 명을 받았다면 좀 더 마음이 편했을지도 모른다. 지독하게 뼛속까지 악독한 사람이 아니라면, 남을 희생시키는 것이 스스로를 희생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법이다.

 

데스몬드는 첫 번째 희생 정신에 대한 시험은 통과했다. 버튼을 누르는 기괴한 일에 자기 자신의 삶을 희생시키는 일 말이다. 그런데 두 번째 희생 정신에 대한 시험에서는 망설이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타인을 희생시키는 것은 더 큰 고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과연 데스몬드는 이 시험을 통과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