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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소설

도스또예프스끼 <상처 받은 사람들, 1861>

by R.H. 2019. 2. 16.

 

 

 

 

"이것은 우울한 이야기다. 아주 빈번히, 눈에 띄지 않게, 거의 비밀스럽게 뻬제르부르그의 무거운 하늘 아래에, 거대한 도시의 어둡고 감추어진 골목길에서, 어지럽게 소용돌이치는 삶, 둔중한 이기주의, 서로 충돌하는 이해관계, 음울한 방종, 비밀스러운 범죄의 한가운데서, 이 모든 무의미하고 비정상적인 삶으로 가득 찬 끔찍한 지옥 한가운데서 벌어지는 음울하고 괴로운 이야기 중의 하나인 것이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계속된다."

 

 

두 이야기

 

 

이 소설은 서로 다른 별개의 두 이야기가 꼭지점 먼 끝에서 시작해서, 결국에는 하나의 지점에 이르는 구성 방식을 하고 있다. 두 이야기 모두 가족 간의 화해와 사랑에 대한 것인데, 하나는 파멸적인 결말이고, 다른 하나는 부분적 해피엔딩이다. 그리고 이 부분적 해피엔딩의 이야기는 좀 아침 드라마적이다. 이 파트는 나따샤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나따샤와 알료샤

 

 

나따샤는 사랑에 눈먼 똥 멍청이다. 자신의 아버지가 발꼬프스끼 공작에게 철저히 농락당하고, 모욕당한 걸 알면서도, 발꼬프스끼 공작의 아들 알료샤와 사랑에 빠져 집을 나간다. 그렇다고 알료샤가 제대로 된 놈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알료샤는 "세상 물정 모르는 이기주의자다" 그는 순진무구하다. 누굴 속일 줄도 모르고, 누구에게 싫은 소리도 할 줄 모른다. 세상 모든 것, 세상 모든 사람을 다 좋게 보는 순진한 어린아이 같다. 그래서 그는 책임질 줄 모르고, 주장을 할 줄도 모르며, 결단을 내리지도 못한다. 그저 마냥 어린아이처럼, 자기 좋은 것만 찾아다닐 뿐이고, 칭얼거리고, 어리광 피울 뿐이다. 그래서 그는 교활한 아버지 발꼬프스끼 공작이 깔아놓은 밑밥도 눈치 채지 못하고, 그를 마냥 인자한 사람으로만 본다. 알료샤는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자기 편할 대로만 생각하는 "영원한 미성년"인 것이다. 이 소설에서 가장 사악하게 그려지는 것은 발꼬프스끼 공작이지만, 글쎄... 어쩌면 이 세상을 가장 더럽히는 인간은 바로 알료샤 같은 인간일지도 모르겠다. 선과 악의 경계를 편할 대로 흩트려버리는 인간,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의 인간... 자기 마음 편한 게 제일 중요한 인간...

 

 

이런 나따샤의 알료샤의 사랑 이야기는 전혀 아름답지도 슬프지도 않다. 그들은 허구한 날 울어 대는데, 전혀 슬프지가 않어.. 도리어 화딱지가 나고, 짜증만 솟구칠 뿐이다. 이기적인 등신들, 이기적인 머저리들.. 소리가 절로 나온다.

 

 

노인 스미트와 소녀 넬리

 

 

다른 이야기의 축은 넬리를 중심으로 펼쳐지는데, 사실 나따샤의 사랑 이야기와 똑같다. 그런데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밀도 높은 증오, 분노, 고통, 슬픔으로 가득 찬 파멸의 이야기다. 나따샤의 이야기가 티비 드라마적이라면, 넬리의 이야기는 문학적이다. 이야기가 흘러가는 모습 역시 판이하게 다르다. 나따샤의 이야기는 평면적으로 흘러가는데 반해, 넬리의 이야기는 후반부부터 시작해서, 이야기의 진실을 나중에 알게 되는 방식이다. 입체적이고 다이내믹하다. 그래서 궁금증을 유발하고, 독자를 이야기에 몰입시킨다. 소설 시작에는 자초지종을 알려주지도 않고서 어느 노인의 죽음을 다짜고짜 독자에게 던져주고, 이야기 중간에는 의문의 소녀를 툭 던져 놓아 끊임없이 독자의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면서 이야기를 전개한다. 

 

 

바냐와 마슬로보예프

 

 

나따샤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와 넬리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 두 이야기는 아무런 공통분모 없이 개별적으로 진행되는데, 이 두 이야기에 연결 고리가 생기는 건 우연이다. 우연히 작중의 '나' 바냐가 일면식도 없는 노인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이 두 이야기에 접점이 생기기 시작한다. 그런데 바냐는 작가다. 절묘하다. 고통받고, 상처받은 사람들을 들여다보는 사람... 그래서 바냐는 이 두 이야기 사이를 오가며,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같이 기뻐하고, 같이 분노하고, 같이 슬퍼하지만, 그들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해결해 주지는 못 한다. 단 한 가지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다.. 그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작가의 역할에 충실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그들에게 공감해주는 것. 그들을 보듬어 주는 것. 그것이 작가의 역할이니까. 

 

 

그들의 문제를 그나마 조금이라도 개입해서 해결해주는 것은 흥신소를 하는 마슬로보예프이다. 어딘가 불법적인 일을 하고, 어딘가 비열하고, 어딘가 협잡꾼스러운 이 인간이 아이러니하게도 넬리에게 그나마 현실적인 면에서 가장 도움이 되는 인간이었다. 

 

 

그래서 결말은...

 

 

나따샤의 아버지 이흐메네프는 나따샤를 용서하지 못한다. 상처받은 자존심 때문이다. 세상 밖으로 밀려난 사람에게, 패자에게 자존심이란 얼마나 지독한 고통인지... 넬리의 엄마가 그랬고, 넬리의 외할아버지가 그랬다. 그들은 선 밖으로 내몰리고, 모든 것을 빼앗겨 버린 사람들이다. 돈도, 사랑도, 가족도, 희망도, 미래도 빼앗긴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오직 자존심, 상처 받은 자존심뿐이었다. 그리고 그 자존심이 그들을 죽음과 파멸로 내몰았다.

 

 

그런데 나따샤와 그녀의 아버지 사이에 넬리가 개입되면서, 나따샤의 가족 간의 화해가 이루어지고, 이야기는 얼마간의 해피 엔딩으로 끝난다. 얼마간의 해핑 엔딩이라 한 것은 사악한 발꼬프스끼는 어떤 타격도 입지 않고, 넬리는 병으로 죽기 때문이다. 사악한 발꼬프스끼 공작이 응당의 대가를 받지 않고 끝나는 결말이 분통이 터지는데... 아니지, 그렇지, 마슬로포예프가 남았지. 공작의 구린 구석을 확실하게 알아낸 협잡꾼이 이 좋은 먹잇감을 그대로 놔둘 리가 없지.. 기름 때는 기름으로 지우고, 개는 개로 잡아야 하니.. "인생은 상거래"라는 신념을 가진 악당을 잡는 데는 흥신소 협잡꾼이 제격일 것. 이것이 우리가 사는 현실이기도 하다...

 

 

 

"나는 내 갈길로 갔다. 두시가 지나 있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고, 밤은 어두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