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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소설

에밀 졸라 <나는 고발한다, 1898>

by R.H. 2017. 2. 8.



 



"진실이 전진하고 있고, 아무것도 그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 못하리라"



인간을 바라보는 에밀 졸라의 시선은 위험하다. 그의 소설들 속 인물들은 욕망과 공포 사이를 어쩔줄 몰라하며 허우적거리다 파멸로 치닫는 경우가 많다. 에밀 졸라의 <루공마카르 총서> 기저를 흐르는 사상은 결정론이다. 인간 본성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졌고, 여기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얼핏 위험해 보이는 사상이고, 이걸로 욕도 좀 많이 먹으셨다. 특히 진보진영에서. 이렇게 그의 시선은 위험할 뿐만 아니라, 매우 차갑기도 하다. 작가는 무심한 얼굴, 차가운 회색빛 눈으로 멀찌감치 떨어져서 상황과 인물을 냉정하게 바라본다. 차가운 시선으로 뜨거운 욕망에 대해 기록한 느낌이다. 



이런 그가 드레퓌스 사건, 애국보수주의와 인종주의가 물결치는 이 사건에, 뜨겁게 뛰어들고, 투쟁적인 글들을 쏟아냈다. 주저함 없는 문장이다. 조금도 변명 조의 문장이 없다. 빠져나갈 구멍따윈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문장이다. 줄기차게 진실과 정의만을 요구하는 직설적인 문장뿐이다. 신기하다. 어떻게 이렇게 다른 온도의 글이 한 인간에게서 나온단 말인가. 



보통 진영의 글쓰기를 하는 사람들은 문학적 글쓰기가 서툴다. 계몽주의에 대한 강박 때문인지, 삐뚤빼뚤하고 투박하고 유치한 글이 나오기 일쑤다.(요즘 그런 영화들이 좀 있다. 뭘 말하고 싶은지 알겠고, 동조도 하는데, 도저히 못 봐주겠는 영화들 있지 않습니까.) 반대의 경우도 비슷하다. 소설은 간접화법으로 쓰인다. 작가가 만들어낸 가상의 세계, 가상의 이야기, 가상의 인물에 작가는 자기 생각을 투영한다. 이런 간접화법을 선호하는 사람은 직접화법의 글을 쓰는 걸 꺼려한다는 느낌이 있다. 불편해한다고나 할까. 그런데 에밀졸라는 이렇게 결이 다른 형태의 글을 모두 다 매끈하게 뽑아내신다. 



여튼 사십 년간 사십 권의 쓴 대작가, 전 세계에 자기 책이 번역되어 팔리는 작가. 이런 그가 자신의 모든 걸 걸고, 자신과 아무 이해관계도 없는 드레퓌스의 무죄를 외친다. 



보불전쟁의 패배 이후, 화풀이 할 대상을 찾고 싶어하는 군중들. 독일한테 뺨 맞고, 유태인한테 화풀이하는 격이다. 이 사건이 잘못되었다는 건 군 당국도 알고, 정부도 알고, 언론도 안다. 모두 안다. 그런데.. 자기 잘못을 절대 인정하지 않으려는 군당국과, 여론의 추이에 촉각을 세우며 다음 선거만을 생각하는 정치인들, 자극적인 기사로 신문 팔아먹기에만 급급하는 쓰레기 언론. 



그리고 무엇보다 애국보수의 광기에 사로잡힌 군중들. 그렇다. 군중들이 미쳤다. 심지어 미래세대인 대학생들까지도 거리에서 악을 쓰며 극우의 언어를 뱉어낸다. 에밀졸라는 <청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극우에 물든 이런 청년들을 안타까워한다. 한 줌도 안되는 어버이연합의 행패에 말려드는 것도 꺼려하는 것이 사람 마음인데, 군중 모두가 광기 어린 어버이연합이라면, 과연 그 누구가 진실과 정의를 위해 입을 열겠는가. 그것도 많은 것을 이룩한 사람이라면 말이다. 



문학적 성취를 다 이루었고, 불의 앞에서 진실과 정의를 외친 작가, 눈먼 군중들의 모욕에도 굴하지 않은 작가, 끝까지 진실만을 요구한 작가.. 우리에게 이런 작가가 있었는가. 목소리는 커도 작품은 조잡한 경우가 많고, 작품은 거대해도 목소리가 더러운 경우는 더 많았다. 무엇보다 목소리도 작품도 강했으나 ,결국은 권력자에 붙어서 우리를 배반한 치떨리는 자들도 있었으니.. 에밀 졸라는 사랑입니다.



P.S.

에밀졸라의 소설 중에 처음 읽은 것은 <인간 짐승>. 이후, 바로 <루공마카르> 총서를 찾아헤맸다. 이 작가의 글은 모두 읽어야만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럴수가, 당연히 전집이 나와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없엉. 어떻게 이럴수가 있지.. 싶으면서 뜬금없이 도스또예프스끼 전집을 출간한 출판사와 러시아어 전공자들에게 감사. 감사. 여튼 지금까지 읽은 에밀졸라의 소설은 인간 짐승, 테레즈 라캥, 나나, 제르미날. 공통적인 느낌은 소설을 읽고 다 읽고 나면, 영화 한 편을 본 느낌이라는 것. 도스또예프스끼 소설이 연극적이라면, 에밀 졸라의 소설들은 확실히 영화적이다. 에밀 졸라가 사진에 관심이 상당히 많으셨다고 한다. 왜 박찬욱 감독이 테레즈 라캥에서 영감을 얻어 박쥐를 만들었는지 알겠는 느낌. (근데 박쥐는 안 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