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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소설

아가사 크리스티 <인생의 양식, 1930>

by R.H. 2017. 3. 4.





음악과 예술, 그리고 천재성에 대한 이야기다. 무겁고 탁한 소재인데, 이 소설은 어딘가 모르게 가볍다. 인물 묘사도 겉도는 느낌이다. 성공 가도를 달리는 세바스찬, 언제나 패자들 편에 서 있는 조, 엘리트 코스를 밟다가 음악에 미치는 버넌이 주요 등장 인물이다. 다들 개성 넘칠 듯한 인물인데, 어딘가 김빠진 느낌이다. 되려 주변 인물들이 생동감 있다. 버넌의 엄마인 마이어와 넬 엄마의 계산속과 이기심, 자식을 쥐고 흔들려는 태도는 정확한 필치로 그려냈다. 이들은 전형적인 중산층 가정주부다. 아가사 크리스티가 이 계층 여성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잘 묘사하는 듯하다. <그 봄에 나는 없었다> 에서도 중산층 가정주부의 자기 기만적 삶을 탁월하게 그려냈다.



무엇보다 주인공 버넌에게 별 공감이 안 간다. 그는 유서 깊은 가문에서 태어난 남자로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은 사람이다. 그러다 어느 날 음악에 사로잡혀 작곡가가 되겠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사랑하는 넬과 결혼하고 싶어 한다. 넬은 전형적인 사교계 여자로 돈, 특히 남자의 돈에 매우 민감한 여자다. 이런 그녀에게 버넌은 '가난하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삶'을 살자고 설득한다. 그런데 어딘가 좀 우습다. 버넌이 자신은 가난하단다. 대저택을 물려받고, 엄마는 런던 타운하우스에 살고, 외삼촌은 군수업체 사장이다. 본인 역시 이튼스쿨과 케임브리지 대학을 나왔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부르주아 가정인데, 자기가 가난하단다. 뭐, 가난은 상대적인 건가. 그런 건가..



한마디로 이 소설은 음악 앞에서 두려워하고 망설이던 버넌이 결국에는 사랑을 완전히 잃어버린 후에야 음악에 미친 듯이 자신을 완전히 내던진다는 이야기다. 천재성에 대한 이야기다. 어딘가에서 도스또예스끼 냄새가 살살 풍겨온다. 아니나 다를까, 소설 후반부에 가면, 버넌은 러시아로 떠나고,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 여러번 도스또예프스끼를 인용한다. 역시, 천재성에 대한 이야기하는 건 도스또예프스끼가 넘버원이죠. 천재성을 감당못하고, 감정이 극한까지 몰려가는 것, 광기와 집착, 욕망과 공포, 그리고 처참한 가난에 대한 묘사는 도스또예프끼 전매특허. 여튼 좀 더 적나라하게 말하면, 이 소설은 도스또예프스끼적인 것을 조금 흉내 내볼까 싶어 한 듯한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