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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소설

박완서 단편 소설 <저렇게나 많이!,1975>

by R.H. 2018. 8. 7.

 

 

 

 

대학 졸업 후 부잣집에 장가가길 바라는 남자와 부잣집에 시집가길 바라는 여자..  애인 사이였던 이 둘은 서로의 욕망을 잘 이해했기에 쿨하게 헤어진다. 그리고 어느덧 7년의 시간이 흘러 흘러, 우연히 길에서 만난 이들.. 남자는 ‘다방에나' 가자고 제안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남자는 코 앞에 있는 다방을 놔두고 먼 길 돌아 돌아 초라한 다방으로 들어서는데...다방 마담과 아가씨는 이 남자를 보자 반색 하며, 말 끝마다 ‘사장님, 사장님'하며 아양을 떤다. 남자가 자신을 과시할 만한 장소로 일부로 이 곳까지 끌고 온 것이다. 

 

 

졸업 후 만난 대학 동기, 그것도 한 때 연인이였던 사이.. '질 수 없다'가 기본 감정인 건 당연하다. 하지만 여자는 자신이 원했던 부잣집 귀부인이 되질 못 했다. 어디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인가.. 그렇다고 멋지게 출세한 것도 아니다. 돈은 꽤 잘 버는 그 바닥에선 쬐금 유명한 영어 과외 선생일 뿐이다. 짧은 더벅머리에 후질구레한 박스티를 입고, 먹고 살기 위해 아둥바둥 살아가는 그녀는 결혼은 커녕, 노처녀이기까지 하다. 그나마 다행이다. 이 날은 그녀의 휴일이다. 휴일이면 그녀는 웨이브가 멋들어지게 들어간 긴 가발을 쓰고, 화사한 원피스를 입고, 뽀족 구두를 신고 나들이를 한다. 이 날만은 일부러 그렇게 한다. 구질구질한 일상에 파묻힌 그녀를 위한 숨구멍의 날이다. 이렇게 멋지게 차려 입은 날, 옛 애인을 만난 것이다.

 

 

하지만 같은 종류의 욕망을 가지고 있던 이 둘은 단박에 서로의 진짜 처지를 알아챈다. 비싼 옷에 화사한 머리를 했지만 그녀가 귀부인이 아니라는 걸 남자는 단박에 알아챈다. 여자 역시 마찬가지다. 사장님 소리 들으며 새끼 손가락에 다이아를 끼고, 비싼 양복을 입었지만, 그 남자 주위에 흐르는 불쾌한 번들거림을 여자는 알아챈다. 어딘가 모르게 저속해 보이고, 싸구려 인생으로 보이는 남자의 진짜 모습을 알아챈다. 

 

 

“별로 밑천도 안 드는 장사야. 요행, 재수, 희망 그런 걸 파고 있어. 사람들이란 그런 걸 줄기차게 원하거든"

 

 

여자의 현재 삶이 어떤지 물어보는 남자의 질문에 웃음으로 상황을 모면한 여자는 거꾸로 남자의 현재 삶을 되묻는다. 그런데 남자는 부잣집에 장가를 들었단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돈 잘 버는 여자하고 결혼했단다. 그 돈 잘버는 일이 무엇인고 하니...무당이란다. 진짜 무당은 아니다. 그러니까 진짜로 신령님을 모시는 것도 아니고, 그 신령스러움을 믿는 것도 아니란다. 당연히 굿도 안 한다. 아니, 못한다. 그러니까, 선무당도 못 되는 사이비 무당인데, 남자 말에 의하면 무려 “학사 무당" 이란다. 대학까지 나온 무당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떼돈을 버는 방법이란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것을 잘 캐치해서 요령 있게 말해주는 것 뿐이다. 

 

 

남자와 인사하고 다방을 나온 여자는 사람들을 본다. 무리 지어 있는 사람들을 본다. 그들이 모두 망령으로 보인다. 자신도 그렇고, 남자도 그렇고, 길거리의 수많은 사람도 그렇다. 욕망… 그 욕망을 언제쯤 실현할 수 있을까에 대한 조바심을 우리는 희망이라 부른다. 하지만 그것은 욕망일 뿐.. 그 찐득한 욕망… 그리고 이 욕망들을 이용해서 돈을 버는 사람들.. 여자는 갑자기 “자신에게 화가 나다 못해 구역질이 났다." 스스로를 망신 주고 골탕 먹여 주고 싶어졌다. 반성인걸까, 후회인 걸까..여자는 “허식의 마지막 잔해인 가발”을 벗어버리고, 그 가발을 "효수 당한 대가리처럼" 손에 들고 흔들어 댄다..

 

 

여자는 그 남자를 한 때나마 사랑했다. 하지만 이젠 추억에서도 지워버릴 것이다. 그 남자를 들여다 보는 것은 자신을 들여다 보는 것이다. 그 남자는 그 여자의 거울이다. 거울에 비친 자기 욕망의 찌꺼기를 직시한 그 여자는 자신의 허식을 상징하는 가발을 내던져버렸다. 그리고 그녀는 남자의 허위도 언젠간 벗겨낼 것이다. 어떻게? 그녀는 소설 말미에 학창 시절에 외웠던 시 구절을 갑자기 읇조린다. 그녀는 다시 글을 읽을 것이다. 다시 글을 쓸 것이다. 그 글에서 학사 무당의 가발을 잡아 뜯고, 그 효수 당한 머리를 광장에서 흔들 것이다. 

 

 

추가//////

 

이 소설이 오늘날 다시 쓰인다면 어떤 이야기가 될까. 이번에도 “학사 무당"은 사람들의 욕망을 캐치 해서 떼돈을 벌 것이다. 그런데 이번 욕망은 조금 다르다. 정의를 바라는 욕망, 공정함을 바라는 욕망, 부정을 처단하고 싶은 사람들의 욕망을 그는 이용할 것이다. 그래서 이 시대의 학사 무당은 과거의 학사 무당과 달리 명예도 얻을 것이다. 게다가 돈은 훨씬 더 많이 벌 것이다. 어떻게? 인터넷이 발달한 세상에서 팟캐라는 요상한 방울이 있기 때문이다. 머리 기르고, 수염 기르고, 검은 넥타이 매고, 팟캐라는 요란한 마이크를 잡고 무당의 방울처럼 흔들어대며, 사람들의 욕망을 이용해서 돈과 명예를 얻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 요망한 학사 무당을 잡아 끌어내기가 쉽지가 않다. 어쨌든 과거의 학사 무당은 사람들이 바라는 돈이라는 욕망, 지극히 속물적인 욕망을 이용했기에, 침을 뱉기 쉽다. 그런데 요번 학사 무당은 사람들이 바라는 정의라는 욕망을 이용하니.. 참으로 교묘하고, 교활하다. 더럽고 더럽다. 소설 속 여주인공처럼 그 허위의 가발을 잡아 뜯어 광장에서 그 효수 당한 가발을 흔들어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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