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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소설

박완서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1995>

by R.H. 2017. 2. 27.





1. <나목>에서 작가는 소극적으로나마 모친살해를 한다. 정신의 탯줄을 끊어낸 것이다. 신화적이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에서도 작가는 엄마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여러 번 드러낸다. 그런데 나목에서 보여준 한결같은 증오심과는 달리 애증이다. 엄마를 어이없어하기도 하고, 부담스러워하기도 하고, 안타까워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하고, 벗어나고 싶어 하기도 하고, 이해하기도 하고... 


"아아, 지겨운 엄마, 영원한 악몽." 이라는 한숨이 엄마에 대한 모든 감정을 요약한다. 어휴.. 엄마란, 참.. 이런 느낌이다. 날 선 감정은 털어낸 것이다. 나목이라는 소설, 즉 상상 속에서 엄마의 죽음을 만들어냄으로써 이뤄낸 것이다. 우리는 상상 속에서나마 감정의 찌꺼기를 제거할 필요가 있다. 과거에 붙들려 있지 않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성장하기 위해, 껍질을 벗기 위해, 여기서 저기로 넘어가기 위해, 그 과정이 꼭 필요하다. 그리고 이 과정을 가장 효과적으로, 부작용없이 실현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야기" 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비극이 필요하고, 복수극이 필요하고, 부친살해와 모친살해의 신화가 필요하다.



2. <그 산이 정말...>의 내용 절반 정도가 <나목>과 겹친다. 우려먹기 아닌가 싶게 비슷한 내용처럼 보이지만, 완전 다른 이야기다.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다르고, 톤이 다르다. 나목은 일상에서 탈출하여 예술로 비상하려는 욕망을 악을악을 쓰며 하는 느낌이다. 감정의 날이 바짝 서있고, 독이 바짝 올라있다. 신경 줄이 끊어질 것만 같다. 비명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 산이 정말..>는 차분한 기록 같다. 단정하게 사건들을 기록한 것뿐만 아니라, 감정도 단정히 정리정돈한 듯한 느낌이다. 실제 내용으로 보자면, <그 산이 정말..>가 훨씬 더 리얼하고(실제 있었던 일이니까) 더 많은 고통의 에피소드들로 차 있는데, 나목이 훨씬 더 고통스럽게 느껴진다. <그 산이 정말..> 역시 비굴, 모멸감, 천박함, 굴욕으로 가득 차 있는데, 비명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제목부터 그렇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그 일들이 정말 있었던 것일까.. 감정이 엷어졌다는 것이다. 자신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에게나 "난폭한 통곡" 의 시간을 통과하는 때가 있다. 잊을 수 있을까. 잊혀지기는 하는 걸까.. 그러나 고통을 덤덤히 기록하고, 감정을 정리정돈 하는 시간이 언젠가는 올 것이라는, 겨울이 곧 끝나리라는, 우리는 죽은 나무가 아닌 봄을 기다리는 나목이라는, 그러니 조금만 더 견디렴이라는 작가의 격려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