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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소설

박완서 <나목, 1970>

by R.H. 2017. 2. 23.





"나는 그를 사랑한다, 나는 그가 필요해"


엄마는 일상이다. 옥희도는 예술이다. 옥희도의 아내는 아름다움이며, 조는 관능이다. 경이는 일상(엄마)을 증오한다. 예술(옥희도)을 소망하고, 관능(조)을 바래보고, 아름다움(옥희도의 아내)을 사랑한다. 그녀가 사랑한 것은 옥희도라는 남자가 아니라, 예술이다. 그녀는 예술이 필요하다. 


회색빛 엄마, 미래를 꿈꾸지 않는 엄마, 현재를 살지 않는 엄마, 과거에 붙들려 있는 엄마, 마지못해 죽지 못해 산다는 식의 엄마. 그리고 지긋지긋한 일상이 있는 고가.. 그녀는 탈출하고 싶다. 탈출해야 한다. 이 죽어버린 집으로부터, 과거로부터, 일상으로부터, 그리고 엄마로부터...


경이는 과거의 엄마를 사랑했다. 생기 넘치는 오빠들과 흐뭇한 미소로 자식들을 바라보는 엄마. 이 얼마나 아름다운 풍경인가. 하지만 전쟁의 참화 속에서 경이는 알게 된다. 엄마가 사랑한 것은 아들들 뿐이었다는 것을.. 오빠들에게 보낸 엄마의 애정이 흘러넘쳐 경이에도 그 애정이 닿은 것이었지, 그 애정이 경이에게로 향한 것은 아니었음을.. 그녀는 애정의 곁불을 쬐고 있었음을. .


"어쩌면 하늘도 무심하시지. 아들은 몽땅 잡아가시고 계집애만 남겨놓으셨노".


딸은 엄마로부터 자기 존재를 부정당한다. 쓸모없는 계집애일 뿐이다. 아니, 아들 대신 죽었어야 하는 존재다. 저주다. 엄마에게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자기 혼자 엄마를 사랑했던 것이다. 속았다. 누구에게 속았나. 내가 나를 속인 것이다. 착각한 것이다. 엄마도 딸인 자신을 사랑했다고 착각한 것이다. 엄마의 진심을 알아버린 지금, 딸은 복수하고 싶다. 


"어머니를, 지금의 내가 비참한 것만큼의 다만 얼마라도 비참하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경이만이 아니다. 세상 모든 딸을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가장 심하게 후려치는 사람은 놀랍게도 엄마다. 사이좋아 보이는 모녀관계도 그 속을 들여다보면, 감정의 착취가 있다. 심지어 딸들은 자신이 착취당한다고 인지도 못하는 경우도 많다. 엄마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착각한다. 과거의 경이가 착각했던 것처럼.. 그러니 벗어나야 한다. 탈출해야 한다. 엄마로부터, 착각한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찢겨진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불쑥 난데없이 찾아간 옥희도씨 집에서 지낸 밤에, 그녀는 야릇한 꿈을 꾼다. 


꿈속에서 경이는 옥희도와 그의 아내를 질투한다. 옥희도씨가 백자로 변한 아내를 탐하는 모습을 질투한다. 하지만 끈적한 남녀관계를 질투하는 게 아니다. 옥희도는 예술이다. 그의 아내는 아름다움이다. 그는 아름다움을 터치하는 예술가,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예술가다. 경이가 부러워하는 것, 질투하는 것, 꿈꾸는 것은 이것이다. 그날 밤의 꿈을 통해 경이는 분명히 안다. 자신의 꿈과 욕망이 무엇인지.. 경이가 되고 싶은 것은 옥희도의 아내가 아니다. 경이는 옥희도가 되고 싶다. 그녀는 예술의 대상이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예술가가 되고 싶은 것이다. 


"고가로부터 놓여나 자유로워진 나는 밝은 아침 햇살에서 섣불리 봄을 느끼기까지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대문을 두드리지는 않았다. 나는 돌아섰다.....나는 결코 어머니를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새삼 문을 두드려 어머니를 보아야 할 까닭이 없었다."


자기 소망의 폭발이다. 욕망의 폭발이다. 꿈속에서 이를 경험한 그녀는 뭐라 설명할 수는 없지만, 자신에게도 설명할 수 없지만, 분명 자기 확신을 갖게 된다. 옥희도의 집에서 고가로 돌아오는 아침, 묘한 상쾌감에 젖는다. 그녀는 집 앞에서 돌아선다. 문을 두드리지 않는다. 더는 엄마의 마음을 두드리지 않는다. 그녀는 문 앞에서 돌아선다. 엄마 앞에서 드디어 돌아선다.


"그 뿐인 것이다. 나는 다만 좀 피곤했다. 그뿐이었다."


바로 다음 날, 엄마는 폐렴에 걸리고, 며칠을 넘기지 못하고 죽는다. 그런데 경이는 슬퍼하지 않는다. 천애 고아가 되었는데도 울부짖지 않는다. 어머니는 자신이 애지중지하던 아들자식에게 간 것뿐이라고 차갑게 되뇐다. 그뿐이라고. 자신은 애통하지도 않고, 애통해할 마음도 없다고. 그저 피곤할 뿐이라고..  드디어 이루어진 엄마, 일상, 과거와의 단절이다.


경이가 그렇게도 갈망하던 회색빛 일상에서 탈출이다. 일상, 먹는 것이 저주로 느껴지는 그 일상. 그렇다. 일상은 저주다. 족쇄다. 감옥이다. 경이는 엄마라는 일상에서, 족쇄에서, 저주에서 탈출한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의 다음 선택은 또 다른 일상(태수)이었다. 태수와의 안락한 삶이었다...


시간이 흘러 흘러 장면 전환.. 따사로운 가을 햇살이 양옥집을 비추고, 침실의 남편은 늦잠을 자고, 그 머리맡에 커피와 신문을 가져다주는 아내. 생기발랄한 두 아이.. 교과서에 나올 법한 중산층 가정의 모습이다. 전쟁과 가난, 배고픔과 모욕의 시간은 흘러가 버렸다. 생계를 위해 치욕스럽게 미군 부대에 들러붙어 일하지 않아도 되고, 그들이 선심 쓰듯 던져주는 대갓집 허드레 음식을 추접스럽게 탐하지 않아도 되는 삶이다. 그녀를 고통스럽게 했던 가난과 모욕에서 벗어난 삶이다. 그런데 그녀는 여전히 배고프다. 여전히 울부짖는다. 일상에 속한 남편이 낯설다. 상식의 세계에 속한 남편이 타인처럼 낯설다. 견딜 수 없이 낯설다. 


이제는 고인이 된 옥희도씨의 작품 전시회에서 그녀는 깨닫는다. 옥희도씨가 그리던 겨울날의 고목이 회색빛 절망인 줄 알았었다. 그런데 이제야, 이제서야 알게 된 것이다. 그것은 "봄에의 믿음" 을 품은 나목이었음을.. 


분명 완결된 소설이지만, 나는 이 소설은 미완성이라고 생각했다. 하다만 이야기라고, 어딘가에 2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뜻한 색 블루-아델의 이야기 1, 2부> 같은 느낌이다. 뒷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물질적 배고픔을 벗어난 것이 다가 아니다. 정신적 배고픔을 해결해야 한다. 일상에서 다른 일상으로 탈출한 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옥희도의 그림을 통해, 그것을 깨달은 그녀는 예술가가 되어야 한다. 이런 뒷이야기가 이어지지 않는다면, 아무 의미 없는 소설이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 소설의 2부는 있다. 소설 속 주인공은 소설 밖으로 튀어나온다. 그녀는 예술가가 되었다. 소설가가 되었다. <나목>은 박완서 작가의 등단작이고, 반자전적인 소설이다. 등단 이후 작가의 삶, 그 자체가 <나목> 2부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