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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소설

박완서 단편 <배반의 여름,1976>

by R.H. 2018. 8. 8.

 

 

어린 여동생의 익사를 경험한 '나'는 물이 무섭다. 이 사고 이후 부모님은 ‘나'에게 수영을 가르치려 갖은 노력을 다 하지만, ‘나'는 물을 거부한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나를 풀장에 집어넣는다. 나는 허우적거린다. 버둥거린다. 그러다 순간 알아챈다. 발이 땅에 닿고, 물은 가슴팍밖에 오지 않는다는 걸... 물이 나를 배반했다. 그리고 나는 이제 더 이상 물이 무섭지 않다. 아버지는 ‘낄낄낄' 웃는다.

 

 

초등학생이 된 나에게 아버지는 태산 같은 존재다. 화려한 술 장식과 황금빛 단추가 달린 멋진 제복을 입고 출근하는 아버지는 그 어느 누구보다도 크고, 존경스러운 사람이다. 가장 단단한 사람이고, 가장 근사한 사람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나를 자신의 직장에 데리고 간다. 그리고 알게 된다. 아버지는 그들의 위엄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요란한 복장을 입은 수위였음을.. 화려한 수위복은 어릿광대의 것이었음을... 아버지는 태산 같이 큰 존재가 아니라, 그들 앞에 90도로 인사하는 낮은 존재인 것이다. 아버지에게 나는 배반당한 것이다. 나는 수위실을 뛰쳐나간다. 그리고 아버지는 또 ‘낄낄낄' 웃는다.

 

 

고등학생이 된 나는 또래의 다른 아이들과 달리 ‘전구라' 선생을 인생의 롤 모델로 삼았다. 학자, 교수, 그리고 성공한 고위 관료인 그는 지덕체의 합일을 이룬 이 시대의 큰 산이요, 성인 군자다. 나는 이 전구라 선생의 모든 전집을 사서 책장에 모셔두고, 그의 사진을 액자에 고이 넣어 방에 걸어두었다. 그는 나의 우상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내 방에 들어와 전구라 사진을 보고는 무섭게 노려본다. 그리고 다시 ‘낄낄낄' 웃는다. 그리고는 전구라 선생의 삶이 얼마나 구라 인생인지를 나에게 알려준다. 아버지 친구의 아내가 출산 중에 수술을 하던 날 밤, 수술비 융통을 위해 택시를 힘들게 잡았는데, 이 전구라 선생이 낼롬 새치기를 하더란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멱살잡이가 좀 있었는데… 전구라 선생은 본때를 보여주겠다며, 아버지 친구를 고소하고, 이 고소를 취하하기 위해 아버지는 전구라 선생에게 읍소에 읍소를 하지만, 온갖 거만과 교만을 떠는 전구라 선생은 꿈쩍도 않더란다. 

 

 

그런데.. 그의 집에 켄트 담배 꽁초가 보이네. 이를 얼른 주머니에 넣은 아버지는 이제 거꾸로 전구라 선생을 협박한다. 당시에 외산 담배를 피우는 것은 벌금에 처해질 일이고, 그것도 고위 관료 집에서 외산 담배를 피우는 것이 발각되는 것은 망신당할 일인 것이다. 상황이 이리되자, 전구라 선생은 거꾸로 아버지에게 읍소에 읍소를 하더란다. 그런데 이 치사스러운 인간을 존경한다고?? ‘낄낄낄'... 나는 또 한 번 태산 같은 존재라 생각했던 인물에게서 배반당한 것이다.

 

 

태산 같이 큰 존재, 공포의 대상, 존경의 대상이 우리를 배반할 때, 우리는 성장한다. 내 안의 모든 우상들이 나를 배반할 때, 나는 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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