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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1

렛미인 (Lat Den Ratte Komma In, 2008) : 결코 끝나지 않을 외로움

by R.H. 2009. 8. 18.

 

<스포일러 주의>

 

흑과 백


어두운 밤하늘, 새하얀 눈이 내린다. 그리고 눈처럼 새하얀 소년 오스칼이 어둠 속에서 단도를 만지작 거리고 있다. 눈처럼 빛나는 미소년 오스칼, 그러나 그의 마음은 밤하늘처럼 어둡기 그지없다. 오스칼이 수집하는 엽기적인 살인사건과 흉기 사진이 실린 기사 스크랩은 새까맣게 멍든 그의 마음을 엿 볼 수 있는 단서다.


오스칼의 하얀 얼굴과 달리 그의 마음이 이처럼 어두침침한 것은 학교 불량배들 때문이다. 학교에서 급우들에게 괴롭힘 당하는 오스칼에게는 친구 한 명 없다. 그의 가정 역시 불안 불안하다. 부모는 이혼했고, 어머니는 직장생활로 바쁘며, 아버지 집에서는 어색하고 불편하기 짝이 없다. 그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외로운 소년이다. 이런 그를 향해 조금씩 다가오는 소녀 이엘리. 그녀는 며칠 전 오스칼의 옆집에 이사 온 12살 소녀다. 아니, 실은 영겁의 세월은 산 벰파이어다.


"그렇지만, 죽이고 싶잖아? 마음으론 죽이지. 안 그래?"


이엘리는 오스칼의 마음을 본다. 그 어두운 마음. 살인과 파괴의 충동, 그리고 세상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는 외로움과 쓸쓸함.


"잠시만이라도... 내가 되어봐."


오스칼은 이엘리의 마음을 느낀다. 살기 위해 누군가의 피를 마셔야 하는 고통, 세상 그 어디에도 머무를 수 없는 영겁의 외로움과 쓸쓸함. 이엘리는 오스칼을 괴롭히는 아이들을 모조리 난도질한 후, 함께 떠난다. 그렇다면, 이것이 그들의 아름다운 사랑일까? 그들은 그 지독한 외로움과 소외감을 떨칠 수 있는 걸까? 이들이 함께함으로 그들 안의 어둠은 사라질 것인가?
 

그의 모습이 오스칼의 미래다.


이엘리의 아버지, 실은 아버지가 아니라 연인이다. 그가 이엘리를 처음 만난 것은 오래 전 오스칼의 모습일 때일 것이다. 그 역시도 오스칼처럼 눈 같은 새하얀 얼굴을 가진, 그러나 어두운 내면을 가진 소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흐른다. 소년은 이엘리의 오빠가 되고, 삼촌이 되고, 이제 아버지가 되었다. 소년은 이렇게 늙고 나이든 남자로 변해버렸다. 하지만, 이엘리는 여전히 12살 소녀다.

 

이 늙은 남자는 변함없이 이엘리를 사랑한다. 하지만, 이엘리는 더 이상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녀는 그를 향해 고함 지르고, 짜증 내며, 심지어 함부로 대하기까지 한다. 그래서 이 늙은 남자는 이엘리에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싶다. 해서, 살인을 하고, 피를 모아온다.
 

이엘리는 여러 명의 아이들을 순식간에 난도질 할 정도의 무시무시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굳이 늙은 남자가 살인해서 피를 모아다 줄 필요가 없다. 그런데도 그는 이 위험천만한 일을 한다.
 

그가 이엘리를 따라나선 순간 그는 세상에서 자신의 흔적을 지운 것이나 다름없다. 그는 세상에서 직장을 구할 수도, 아이를 가질 수도, 가정을 가질 수도, 친구를 가질 수도 없다. 그에게는 오로지 이엘리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런 그가 이엘리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사람을 죽이고, 그 피를 가져다 주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쓸모있음' 을 증명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이엘리가 자신을 지겨워하기 시작하고, 급기야 새로운 미소년을 만나기까지 한다. 그는 초조해진다. 그래서 무리하게 살인을 시도하고,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맞는다.
 

이엘리에게 그 늙은 남자는 어떤 존재였을까? 자신만을 바라보고 수십 년을 산 남자.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제 얼굴에 염산을 들이붓는 이 남자. 그가 빛나는 미소년이었을 때, 분명 이엘리는 그를 사랑했을 것이다. 하지만 일상은 지긋지긋하게 반복된다. 그 반복되는 일상에서 변하는 것은 아름다운 소년의 얼굴이 그처럼 늙어가는 것 뿐이다. 이엘리의 사랑은 식어버리고, 그에 대한 연민만이 남는다. 연민은 사랑이 아니다. 순간을 사는 우리는 연민을 사랑이라 착각할지 모르지만, 영원을 살고 있는 이엘리는 연민이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외로운 소년을 만나고, 그가 지겨워지기 시작하고, 그가 죽는 것. 그녀는 이것을 수십 번도 더 반복했을 것이다. 그 끝나지 않는 시간 속에서 반복되는 외로움, 지겨움, 그리고 타인의 죽음. 그리하여 그녀는 쓸쓸함과 무심함이 뒤섞인 얼굴로 그의 피를 빨아 먹고, 건물 아래로 내던진다. 어쩌면, 이것이 이엘리가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늙은 남자의 비참한 모습은 바로 오스칼의 미래다.
 

이 영화는 아름다운 사랑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 죽는 그 순간까지 결단코 사라지지 않는 지독한 외로움에 대한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