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 작성일 : 2008년 9월 29일
<스포일러 주의>
종교 재판소 : 믿음의 광기
에네스가 억울한 누명을 쓰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그녀가 종교 재판소에 끌려간 이유다. 그리고 그곳에서 고문을 받은 그녀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 거짓 자백을 한다. 영화에서 믿음, 신, 종교는 인간을 고통스럽게 하는 비합리적인 광기 어린 단어들이다. 아니, 악마와 같은 단어 일지도 모른다.
나폴레옹 혁명 : 이념의 광기
감옥에 갇힌 에네스를 보고 욕정에 사로잡힌 로렌조 신부는 그녀를 겁탈한다. 고문에 의한 거짓 자백임을 증명하려는 에네스의 아버지가 파놓은 함정에 빠진 로렌조는 신성 모독 문서에 서명한다. 그리고 이로 인해 프랑스로 도망가는데, 그 곳에서 로렌조 신부는 나폴레옹의 혁명 사상을 받아들이고, 믿음의 인간에서 이성의 인간으로 변신한다.
인간의 눈을 가리고, 이성과 합리를 마비시키는 끔찍하고도 잔인한 믿음과 종교. 그리고 이를 쳐부수는 나폴레옹의 혁명군. 그런데...
자유를 외치는 그들은 여자를 겁탈하고,
평등을 외치는 그들은 물건을 약탈하고,
박애를 외치는 그들은 사람을 벌레처럼 죽인다.
인권선언을 외치는 혁명군은 아무 거리낌없이, 아무 주저함 없이 총을 난사한다.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자유이고, 평등이며, 박애란 말인가? 이것이 바로 인권이란 말인가? 인간의 믿음과 종교의 광기에 진저리 나서, 인간의 이성과 합리로 눈을 돌려보니 그들은 더욱 더 광기 어리다.
인간이 믿음을 핑계 삼아 자신들이 욕망을 채웠고, 또 다른 인간들은 인간의 이성과 합리를 내세우며 자신들의 욕망을 채울 뿐이다. 그들은 서로를 비난하지만, 본질적으로는 같은 인간들이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가 다를 뿐이다. 믿음을 이용하느냐, 이념을 이용하느냐..
믿음과 신앙이 광기 어린 것도, 이성과 이념이 광기 어린 것도 아니다.
인간이 광기 어린 것이다.
종교가 잔인한 것도, 혁명이 잔인한 것도 아니다.
인간의 본질이 잔인한 것이다.
인간의 진짜 얼굴은 흉측하다
These prints are quiet disturbing.
Yes, of course they are. But father, these prints show us true face of our world.
고야의 그림이 성직자인 자신들을 조롱하고, 혐오스럽다고 불만을 토로하자, 로렌조는 말한다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 판화들은 세상의 진짜 모습(진실)을 보여줍니다." 고야의 그림은 인간의 진짜 얼굴을 보여준다.
Why doesn't that painting have the face?
Because he's a gost.
이네스는 고야가 그리다 만 로렌조의 초상화를 보며 왜 얼굴이 없냐고 고야에게 묻는다. 이에 고야는 “그는 유령이니까”, 라고 답한다. 고야가 생각하는 로렌조, 혹은 성직자는 유령이다. 아니 악마다.
고야는 스페인 여왕의 초상화도 그렸다. 그런데 완성된 작품을 본 여왕은 불쾌한 표정으로 자리를 떠나 버린다. 고야가 그녀의 진짜 얼굴을 그렸기 때문이다. 그녀가 바란 초상화는 자기의 실제와는 다른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다. 그녀는 자신의 진짜 모습(진실)을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가 그러하듯이...
세상의 진짜 모습(true face)은 혐오스럽고, 유령(악마)같으며, 추하다. 고야가 혐오스럽고 악마 같으며, 일그러진 인간의 얼굴들을 그린 것은 그것이 화려한 의관과 거짓된 웃음 속에 가려진 인간의 진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로렌조가 처형 당하는 장면을 보자. 한 인간이 죽음의 극한 공포에 떨고 있다. 그 옆에 선 성직자들은 '회개하라, 신의 자비를 구하라' 외친다. 맞은편에서는 점령군이 말쑥한 의복을 하고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다. 수많은 군중들은 환호성을 지르고 있으며, 경쾌한 음악이 광장에 울려 퍼진다. 그가 처형되고 나자 군중들은 흥겹게 춤춘다. 타인의 죽음을 모두가 즐기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고야는 지켜보고 있다. 타인의 고통과 죽음을 즐거워하는 인간들. 고야는 이런 인간의 실체에 진저리가 났을까? 영화가 말해주는 인간의 진실들은 너무도 우울하다.
고야의 유령
그렇다면 고야의 유령은 무엇일까? 고야는 이 같은 인간의 광기와 잔인함을 두 눈으로 지켜보았다. 믿음과 종교에서의 끔찍함, 반대편인 이성과 합리를 외치는 혁명의 잔인함, 그리고 인간들의 광기 어린 진짜 얼굴을 그는 보았다.
인간의 믿음에도 희망이 없고, 인간의 이성에도 희망이 없다. 종교에도 희망이 없고, 혁명에도 희망이 없다. 어쩌면 인간 자체가 희망이 없는 것일 수도 있다. 그 어느 곳에도 희망은 없다. 인간의 악랄함, 잔인함, 추잡한 욕망만이 세상에 가득하다. 이것이 고야가 본 인간이고 세상이다. 그는 인간의 모습에 절망했을지도 모른다. 그가 인간에게서 본 진실(truth)은 유령...아니 악마다.
억울한 자가 언젠가는 보상받는 사회? 에네스는 완전히 미쳐버렸고. 그녀의 가족들은 모두 죽었으며, 그녀의 딸은 매춘부가 되었다. 어린이는 미래의 희망? 로렌조의 시체 주위에서 흥겨운 노래를 부르며 즐거워하는 어린이들.. 이 영화 어디서도 희망의 메세지를 찾아 볼 수 없다. 몸서리치게 우울하다.
Tell me what the truth is !!!
제목이 고야의 유령이어서 공포 영화인 줄 알고 봤다. 물론 이 영화는 공포 영화가 아니다. 그러나 내가 본 어떤 영화보다도 공포스럽고 잔인하다.
진실(truth)을 말해 달라고? 영화는 인간의 진실을 보여준다. 화려한 의상 속에 숨어 있는 인간의 광기, 천사가 그려진 성당 안의 악마 같은 성직자들, 아름다운 인간의 얼굴 뒤에 깃들여진 악마. 그리고 이 모든 인간의 진실을 보게 되면, 그 진실이 너희를 절망케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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