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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소설

기 드 모파상 <비계 덩어리, 1880>

by R.H. 2017. 2. 4.

 

 

 

 

프로이센이 점령한 지역에서, 간신히 통행 허가증을 받은 마차 한 대가 눈 속을 헤치며 빠져나간다. 각계각층을 대표하는 10명의 승객을 태운 이 마차는 사회의 축소판이다. 상인 부부, 부르주아 부부, 유서 깊은 가문의 백작 부부, 2명의 수녀, 혁명가, 그리고 불 드 쉬프(비계 덩어리)라 불리는 한 명의 매춘부.. 모파상이 그린 설국 열차다. 여튼, 데면데면한 사이였던 소상공인 부인, 부르주아 부인, 백작 부인은 마지막 승객의 신분, 즉 매춘부를 알아보자마자 자기들끼리 급하게 친해진다. 마치 건전한 "가정 주부의 위엄" 을 보여주겠다는 듯이.. 다른 승객들 역시 그녀를 외면한다. 어디 감히 천한 것이.. 이런 느낌.

 

 

그런데 점심을 먹기로 한 중간 기착지까지 도착하지 못하고, 더디 달려가는 마차. 미처 음식을 준비 못한 승객들은 허기짐에 정신이 얼얼해지는데... 불 드 쉬프, 즉 매춘부 여인이 음식이 가득 담긴 소쿠리 하나를 꺼내 든다. 심지어 술도 있다. 그녀는 냠냠쩝쩝 맛나게 먹는다. 소상공인이 은근슬쩍 친한 척을 한다. 불 드 쉬프는 음식을 권하고, 그는 낼름 받아먹는다. 그녀는 수녀들에게도 음식을 권한다. 상류층 나리들께도 음식을 권하고 싶지만, 이건 어쩐지 불경스러워 보인다. 그래도 용기 내어, 부끄러워하면서, 얼굴을 붉히며, 더듬더듬 음식을 권해본다. 도도하던 그들 역시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음식을 받아 든다. 

 

 

이렇게 얻어먹은 게 있는데, 계속 불 드 쉬프를 본체만체하며 따돌릴 수는 없는 법.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녀는 생각보다 얌전하고 예의 바르기까지 하다. 심지어 애국심도 있다!! 여기 이 마차에 탄 인간들은 전쟁통에 거래를 성사시켜 돈 벌 생각으로, 혹은 여차하면 외국으로 도망갈 생각으로 이 여행길에 올랐다. 그런데 그녀는 프랑스의 논개다. 자기 집에 들어온 프로이센군의 목을 조르다가 도망치듯 이 마차에 탑승한 것이다.

 

 

허허벌판을 달리던 마차는 드디어 여인숙이 있는 마을에 들어선다. 그런데 어라, 이곳을 점령하고 있는 프러시아 사령관이 '엘리자베스 루세' 양을 찾는다. 이게 누군지? 누구지? 바로 불 드 쉬프, 비계 덩어리로 불리는 바로 그녀다. 이 점령군 장교는 그녀에게 수청을 들라한다. 하지만 우리의 논개 불 드 쉬프는 단호히 거절한다. 씩씩거리며 돌아와 이 사실을 다른 승객들에게 알리자, 그들 역시 자기 일처럼 분개한다. 이건 우리 조국에 대한 모독인 것이다!! 

 

 

헌데 다음날 마차는 출발하지 못한다. 수청을 거부한 그녀에게 심술이 난 프로이센 장교가 이들의 출발을 불허한 것다. 하루 이틀.. 사람들은 답답해진다. 짜증이 난다. 그리고 두려워진다. 전쟁 중에 이곳에 발목 잡혀 무슨 봉변을 당할 것인가. 그러자 그들이 배고플 때 음식을 주고, 적군 장교의 수청을 용맹하게 물리친 우리의 논개가 미워지기 시작한다. 

 

 

그까짓 거 그녀한텐 원래 하던 일 아닌가. 뭐가 대수란 말인가. 원래 그 짓으로 먹고 살았으면서, 누구는 되고 누구는 왜 안되는가. 막말이 나오기 시작한다. 그러자 가장 점잖을 빼던 백작이 나선다. 그녀를 어르고 달래고 비위도 맞춰보고.. 그래도 꿈쩍 않는 그녀. 그녀는 애국 자니까요.. 그러자 최후의 카드를 내민다. "희생 정신" 니가 이 일을 하면 나머지 사람들이 얼마나 감사하게 생각하겠느냐는 것이다. 아.. 우리의 논개는 이 위험하고도 달콤한 희생 정신이라는 단어에 속아 넘어가 버리고 만다.

 

 

결국, 마차는 출발한다. 하지만 그녀가 마차에 올랐을 때, 그들은 차갑게 외면한다. 마치 병균이라도 옮겨온 것 마냥,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모욕과 경멸이 하나 가득하다. 그들이 배고플 때, 불 드 쉬프는 기꺼이 자기 음식을 그들과 나누었건만, 급하게 마차에 올라타느라 음식을 준비하지 못한 그녀에게 그 누구도 음식을 권하지 않는다. 그녀의 아름다운 두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아 고개를 숙여보지만, 눈물은 흐르고 또 흐른다. 분함과 억울함에 눈물은 흐르고 또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