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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정리

1970년대 이후 중동의 혼란 (이란혁명, 이란 이라크전, 걸프전)

by R.H. 2009. 9. 4.

 

이란 혁명과 2차 오일 쇼크 : 1979년

 

혁명의 배경 

 

1차 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의 냉전구도 속에 미국은 이란의 팔레비 왕조 지원.  이를 기반으로 막대한 석유이익을 구축한 팔레비 왕조는 탄압정치로 일관했다.

 

1970년대 석유이윤을 기반으로 이루어진 이란의 근대화는 신흥 특권 계층을 만들어냄과 동시에 기존의 이슬람 원리를 기반으로 한 전통을 붕괴시키고, 농촌과 소상인의 바자(시장)을 몰락시킨다.

 

혁명의 전개

 

이란 국민의 대다수인 시아파 지도자 호메이니는 이슬람 원리주의에 입각한 공동체 재생과 왕조 타도 주장. 이에 이란 내 좌익과 바자 상인 등이 호응하여 팔레비 왕조를 붕괴시키고 이슬람 공화국 탄생

당시 이란은 석유의 전면 금지 조치를 취했는데, 이로 인해 오일 가격이 약 2.5배 상승했다.

(15불에서 38불로 급등)

 

이란, 이라크 전쟁 (8년 전쟁) : 1980년~1988년

 

전쟁의 원인

 

1975년 이란의 팔레비 왕조와 후세인 사이에 체결된 국경협정인 '알파협정'을 1979년 이란혁명 이후 이란 측이 일방적으로 파기하면서 이라크가 선제 공격.

 

이란과 이라크는 같은 중동 국가, 이슬람 국가 이지만  판이하게 다르다. 이란의 민족은 페르시아 민족이고, 종파는 시아파인 반면, 이라크는 아라비아 족이고 수니파이다.

 

종전

 

전쟁 후반부에 양국은 상대국 영해를 지나가는 유조선에 무차별 공격을 가한다. 이에 미국과 소련 등의 강대국은 자국의 석유 공급에 위협을 느끼게 되고, 이란과 이라크 양국에 종전 압력을 행사한다. 그리고 결국 1988년 8월 20일 정전 협정을 맺는다.

 

걸프 전쟁 : 1990~1991년

 

전쟁의 배경

 

쿠웨이트는 역사적으로 원래 이라크 남부 바스라주의 한 군에 지나지 않았다. 20세기 초의 제국주의 당시 영국은 페르시아만 일대의 석유 매장량을 확인하고 국가 분할을 계획한다. 지리적 요충지로서의 성격도 있다고 판단했다.

 

참고로 지금의 말레이 반도 하단에 위치한 싱가폴 역시 원래는 말레시아의 한 지역에 불과했다. 쿠웨이트와 마찬가지로 제국주의 당시 영국은 지리적 요충지인 싱가폴을 말레이시아에서 분리시켜 하나의 나라로 만들어 지금의 싱가폴이 탄생.

 

중동의 요충지 확보를 위해 영국은 이라크 의사와 상관없이 독단적으로 국경선을 긋고, 지방 토호였던 사바족을 쿠웨이트 왕가로 만든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이라크는 쿠웨이트를 독립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쿠웨이트는 태생적 한계로 친서방적인 정책을 폈는데, 예를 들면 석유 생산국들의 원유 감산 방침에도 독단적으로 증산하기도 했다.

 

이란 이라크 전쟁 당시 쿠웨이트는 이라크 영토 일부를 포함한 유전 개발로 이라크를 자극했고, 이라크에 대해 채무 상환을 촉구하는 등 압박을 가했다.

 

전쟁의 전개

 

1980.8. 2  :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6시간 만에 수도 장악

1991.1.17 : 미국을 주축으로 한 다국적군의 바그다드 공습 "사막 폭풍 작전" 개시

1991.1.28 : 이라크 항복

 

전쟁의 결과

 

무적이라 일컬어지던 이라크 군은 42사단 가운데 41사단 궤멸되고 15만 명의 피해자가 발생했다. 반면 다국적군의 피해자는 126명에 불과했다.

 

기름 값 약 2배 상승(15불에서 30불로 상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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