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강력 스포, 결말까지 모두 적어놨음>
이원규 : 합리주의 엘리트
차사를 보좌하며 섬에 들어오는 이원규. 그가 처음 등장할 때 들고 있는 물건은 망원경이고, 살인사건 현장에서는 안경을 꺼내 든다. 이 물건들은 그가 어떤 인물인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망원경은 멀리 내다보기 위해 사용하는 물건이고, 안경은 사물을 명확히 들여다보기 위해 사용하는 물건이다. 그는 멀리보고, 명확히 보고자 하는 논리형 인간인 것이다.
이원규는 절제된 몸가짐과 예를 지니고 있지만, 어딘가 모르게 차갑다. 그가 섬주민을 대해는 태도는 온정적인 듯 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거만하고, 냉정하다. 그가 가지고 있는 이 기묘한 느낌의 거만한 온정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그의 아버지가 낸 수수께끼를 풀며 오가는 대화 속에 답이 있다. 흉년에 소작농에게서 쌀을 거두지 않는 이유는 백성들을 안타깝게 여겨서가 아니다. 헐벗고 굶주린 백성에 대한 인간적 동정심이나 안타까움이 아닌 지배자의 논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지배자는 채찍만이 아니라 당근책도 사용해야 한다는 논리 말이다. 따라서 그가 백성에게 보이는 온정은 동등한 인간으로서의 인격적 존중이 아니라, 지배 수단으로서의 온정이며, 동시에 양반으로 태어난 자로서 지켜야 할 품위로서의 자비다.
김인권 : 냉소주의자
"강한 자에게는 한없이 비굴하고, 강한 자가 빈틈을 보이면 그 골수까지 파먹으려 드는 것이 저들의 마음이지요."
김인권은 이원규가 낸 수수께끼의 답을 알면서도 모른다고 한다. 이는 흉년에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논리에 동조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는 왜 백성에 대한 온정주의를 비웃는 걸까?
김인권은 강객주 사건의 모든 전말을 목격했다. 그 사건의 한 가운데서 인간의 모든 심성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본 것이다. 공적에 대한 욕심으로 법질서를 무시하는 관리, 기존 질서 유지를 위해 비양심을 묵인하는 아버지. 무엇보다도 빚을 탕감 받으려는 사소한 욕심에 온정을 베푼 자를 배신하는 섬주민들. 강한 자의 호통에 한없이 비굴하게 굴며, 두려운 마음에 무당을 찾아가 부적이나 구하는 그들. 모든 것을 본 자, 인간의 모든 심성을 본 자. 그는 냉소주의자가 될 수 밖에 없다.
여기서 특이한 점은 김인권은 물을 무서워하는 공포증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는 섬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고, 그 섬에 갇혀 살아야 하는 운명이다. 대체로 냉소주의자가 폐쇄적인 성격이라는 점에서 볼 때 적절한 설정인 것 같다.
강승률(강객주) : 중도주의자
강객주는 신지식인이다. 그는 서학의 영향을 받아 능력으로 상하질서가 정해질 거라며 고아인 두호에게도 그림과 염료 일을 가르쳤다. 또한 섬주민들에게 초기 정착금을 저리로 빌려주며, 그들에게 온정적으로 대했고, 섬주민들 역시 이런 그를 존경했다.
하지만 강객주가 급진적 성향을 가진 혁명가는 아니었다. 두호가 자신의 딸을 구해주었음에도, 두호를 매질하는 모습에 그의 한계를 볼 수 있다. 제지소를 섬에 두었다는 설정 역시 그의 한계를 보여준다. 종이는 지식식을 확산하는 물건이다. 그런데 강객주는 제지 공법이 빠져나가는 것을 꺼려했다고 한다. 그가 신지식임에도 불구하고, 지식의 공유를 그다지 반기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그는 상인으로 중인 신분이었다. 그는 자신의 신분으로 인해 수많은 좌절을 경험했을 것이다. 그는 능력 있고 덕망 있는 인물이었음에도 중인이라는 신분적 한계로 인해 적지 않은 굴욕을 경험하고, 비합리적 상황에서 어금니 깨물고 몸을 수그려야 하는 상황을 수없이 겪었을 것이다. 그가 말한 능력으로 정해지는 상하질서는 사실 자신을 위해 한 말이었을 것이다. 그가 칼을 빼어 드는 것은 자신과 가족의 목숨이 위태로울 지경에 이르러서였던 것이다. 그는 백성에게 온정을 베풀었을지언정 그들을 위해 칼을 빼어 들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가 보여준 백성에 대한 온정은 어설픈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자신의 딸에게 연정을 품고 있는 두호를 가차없이 매질했던 것이고..
김치성 : 수구 봉건 세력
늙고 병약하며, 자기 몸 하나 가누기 어려우면서 호통만 쳐대는 김치성 영감은 기존 봉건 세력의 모습이다. 그는 섬의 안위를 위해 강객주에 대한 무고를 묵인했다고 한다. 하지만 본심은 천한 장사치가 큰 부를 쌓고, 천민들에게 존경 받는 것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그리고 강객주가 죄가 없는 것은 아니라 했다. 그의 죄는,
"반상의 질서가 엄연한데, 종놈들과 겸상을 하고 천한 백성 놈들에게 장부를 맡겨 그 질서를 어지럽히니 그것이 죄가 아니면 무엇이 죄란 말이냐!"
종들과 밥을 같이 먹고, 장부를 맡기는 것이 강객주의 죄라 했다. 수구 봉건 세력인 그에게서 논리와 합리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는 상것들과는 겸상할 수 없다는 억지 소리와 악다구니를 뱉어낼 뿐이다. 김치성에게 있어서 구질서를 따르지 않는 자는 이유 불문 역적이다.
섬주민 : 무지하고 배은망덕하며 뉘우칠 줄 모르는 자들.
섬주민들은 강객주의 무죄를 알면서도 외면했다. 그 중 어떤 이들은 발고까지 했다. 특히 두호는 강객주에게 큰 은혜를 입었음에도 발고에 가담했다. 고아인 그를 거둬주고 길러주고 가르치기까지 했는데 말이다. 인간의 마음은 누군가에게 100가지의 은혜를 입었다 하더라도 단 1개의 서운함만을 깊이깊이 기억하는 법이니..
섬주민들은 기괴한 살인사건들과 현상을 목격하면서도 자신들의 배은망덕과 욕심을 뉘우치지 않는다. 오히려 다른 이의 피로 용서를 구하려 한다. 닭을 산채로 목을 따서 그 피를 뿌리고, 두호를 붙잡아 낫으로 찍어 내린다. 그런데 더욱 기묘한 현상이 일어난다. 하늘에서 피의 비가 내리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뉘우칠 줄 모른다. 이제는 김치성 영감을 죽여야 한다고 소리치며 또 다른 희생양을 찾고 있다.
이원규, 그 후는...
이원규는 자신의 아버지가 강객주 사건을 맡은 도포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아버지의 공적에 대한 욕심이 강객주의 억울한 죽음에 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도 안다. 이제 그는 아버지의 과오를 들추어 내려 하지만, 그의 상관은 이런 그를 말린다. 그와 이원규만 아는 증거물인 직물을 폐기해 버리면 아무도 모를 일이라면서.. 그럼에도 이원규는 진실을 드러내려 했다.
그런데 그는 섬주민들의 광기를 모두 보았다. 그는 김인권이 보았던 인간의 더러운 심성들을 낱낱이 목격했다.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 인간의 심성을 꿰뚫어 볼 줄 아는 것은 불행이다. 어쩌면 통찰은 저주일지도 모른다. 이 사건 이후에 이원규는 김인권의 냉소주의를 이해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진실을 품고 있는 직물을 조용히 바닷속으로 떨군다. 세상 모든 인간이 더러운 것을 보았으니, 홀로 진실을 들추어 낸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섬을 나간 이원규는 김인권보다 더한 냉소주의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인간에게 절망하고, 인간에 대한 믿음을 상실한 그는 눈곱만큼의 온정도 없는 지독한 착취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백성에게 온정을 베푸는 신지식을 배신한 하층민, 그리고 이를 목격한 합리주의 엘리트의 절망과 냉소. 이런 조선 사회는 자체 개혁을 못하고, 처참하게 쓰러지고 만다. 그리고 이는 조선말기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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