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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

욥기 : 결말에 대해

by R.H. 2018. 5. 21.



욥이 주께, 자기 친구들을 용서해 주시라고 기도를 드리고 난 다음에, 주께서 욥의 재산을 회복시켜 주셨는데, 욥이 이전에 가졌던 모든 것보다 배나 더 돌려주셨다. 그러자 그의 모든 형제와 자매와 전부터 그를 아는 친구들이 다 그를 찾아와, 그의 집에서 그와 함께 기뻐하면서, 먹고 마셨다. 그들은, 주께서 그에게 내리신 그 모든 재앙을 생각하면서, 그를 동정하기도 하고, 또 위로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그들은 저마다, 그에게 돈을 주기도 하고, 금반지를 끼워 주기도 하였다. 주께서 욥의 말년에 이전보다 더 많은 복을 주셔서, 욥이, 양을 만 사천 마리, 낙타를 육천 마리, 소를 천 겨리, 나귀를 천 마리나 거느리게 하셨다. 그리고 그는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낳았다. 첫째 딸은 여미마, 둘째 딸은 긋시아, 셋째 딸은 게렌합북이라고 불렀다. 땅 위의 어디에서도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를 찾아볼 수 없었다. 더욱이 그들의 아버지는, 오라비들에게 준 것과 똑같이, 딸들에게도 유산을 물려주었다. 그 뒤에 욥은 백사십 년을 살면서, 그의 아들과 손자 사 대를 보았다. 욥은 이렇게 오래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새번역> 욥기 42장 10절~17절



신은 욥에게 복을 내려준다. 재산은 더 많이 늘어나고, 자식도 다시 10명을 얻는다. 그리고 그렇게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로 결말이 난다. 좋게 말해서 동화 같은 결말이고, 나쁘게 말해서 게으른 결말이다. 아니, 위험한 결말일 수도 있다. 욥에게 다시 부와 건강을 되돌려 주었다는 이 해피엔딩은 잘못된 시그널을 주기 때문이다. 구약에서 그렇게 까대는 기복신앙적 결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힘들어도 참고 견디면 복을 얻는다는 왜곡된 메시지까지로 확장이 되어버리곤 한다. 



그렇다면, 어떤 결말을 내야 할까. 42장 10절~17절을 삭제한 채, 신의 응답으로 욥기를 마무리하는 결말이었어야 할까.. 그냥 욥이 모든 것을 잃고 망한 채, 인간은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못 한다는 맥 빠지는 신의 대답 만을 얻은 채 끝냈어야 할까.. 



그냥 욥이 망한 채로 이야기를 끝내는 것도 사실 마땅치는 않다. 구약엔 천국과 지옥이라는 개념이 없기 때문에, 죽으면 끝이다. 그래서 욥이 고통만 받다가 죽어버리면 엉망이 된다. 고통만 받는 인생이지만, 죽고 나면 천국 간다는 신약의 개념이 있으면 42장 10절~17절 없이 결말을 내도 되는데,(뭐, 사실 신약에서 등장하는 천국과 지옥이라는 개념도 기복신앙적인 면이 있긴 하다. 하지만 개런티 안 되는 복이다. 천국에서 누리는 게 현세적 복과 같다는 증거도 없고.)  구약에서는 사후 세계 보장이 없기 때문에, 42장 10절~17절이 없는 최종 결론은 허무주의로 오역 될 여지가 생겨버린다. 고통만 받다 죽는 인생...  해서 욥에게 다시 부와 건강을 되돌려 준 것. 


여튼 결말은 두 가지로 나올 수 있는데, 둘 다 오독을 가져올 수 있는 상황이다. 복을 준다 어쩐다는 내용 없이 끝내면, 허무주의의 함정으로... 복을 주는 걸로 끝내면 기복 신앙의 함정으로.. 이렇게 끝내기도 그렇고.. 저렇게 끝내기도 그렇고... 그래서 나는 욥기가 완성되지 않은 이야기라고 본다. 욥기 이야기의 진일보한 이야기는 예수의 고난이다. 예수는 현세에서 복을 보상받지 못한다. 본인이 보상을 바라지도 않았다.(사탄이 세상 모두를 준다고 해도 거절했음)


고통만 받다가 죽는 예수 이야기가 욥기적 고통에 대한 더 정확한 해석이 될 것이다. 고통을 겪고 물질적 부를 보상받는 것이 아니라, 고통만 받고 그 삶은 철저히 부서지는 것. 하지만 그 정신이 길이길이 남는 것. 욥기적 고통을 왜 감내해야 하는 가에 대한 결론은 예수의 고난과 죽음에서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예수 고난의 이야기 역시 미완성의 이야기다. 신약은 사후 세계에서의 복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도 기복 신앙이 묻어있다. 하여 예수적 고난은 욥기적 고난보다 진일보한 이야기지만, 여전히 미완성이다. 


이 의로운 자의 억울한 고통의 이야기가 정확하게 마무리되기 위해서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어떤 보상이 없어야 한다. 동시에 허무주의도 패배주의도 없어야 한다. 그게 가능한 이야기일까.. 가능한 이야기다. 나는 우리 시대에 이 고통의 이야기가 마무리 되는것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