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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1

몽상가들 (The Dreamers, 2003) :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by R.H. 2010. 12. 5.



영화 포스터는 완전 에러다. 영화에서 저 장면은 이사벨이 테오에게 "영원" 을 이야기하지만,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해 불안해 하는 장면이다. 영화 이후의 이야기들을 넌지시 비춘다고도 볼 수 있는 장면. 그런데 포스터에서는 마치 두 남자 사이에서 즐기는 듯한 표정이다. 게다가 누구나 상상했던 유희라는 문구까지 삽입되어가지고, 뭔가 은밀한 분위기를 풍기는데.. 실제 영화 내용과는 완전 동떨어진, 정말 맘에 안 드는 포스터. 포스터에 대한 불만은 여기까지하고, 이제 영화 얘기로..

"연립내각의 앞잡이 말로 장관은 시네마테크 원장인 앙리 랑글루아를 몰아내려 합니다."
랑글루아는 정부에 의해 해임됐고 파리의 모든 영화광들은 궐기에 나섰다. 그런 우리들만의 문화혁명이었다.

68혁명막 불붙기 시작하는 때. 파리에 어학연수를 온 미국청년 매튜는 테오와 이사벨 쌍둥이 남매를 만나고, 그들 부모님이 여행을 간 사이 기묘한 동거를 시작한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스크린에 열중하는 그들 모습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세 사람은 모두 영화광이다. 영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이루어지고,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을 되돌릴 수 있고, 세상을 호령하는 초능력자도 될 수 있는 세계. 우리가 상상하는 모든 꿈이 손쉽게 이뤄지는 그 곳. 그들이 영화에 열광하고 몰입하는 것은 어쩌면 쉽게 만져지지는 않는 현실을 벗어나, 도피처를 찾고 싶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직 현실에 발을 제대로 디딛지 못한 그들은 그래서 영화에 몰입한다. 그리고 그들만의 공간에서 영화처럼 산다. 영화를 흉내내고, 영화 맞추기 게임을 하고, 책으로 혁명을 읽는다. 매튜의 지적처럼 테오는 아늑한 자신의 방에서 비싼 와인을 마시며 영화를 말하고 모택동주의를 이야기한다. 말 그대로 이야기만 하는 것이다. 테오는 아직 거리의 붉은 깃발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대신 집 안을 붉은 포스터로 장식한다.

첫 경험은 뭐가 되었든지간에 힘겹다. 알을 깨고 나오기 위해서는 피를 봐야한다. 테오는 아직 피를 볼 준비가 안 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혁명과 파괴, 그리고 성장은 동의어다. 기존의 틀을 깨는것, 피를 보는 것, 순진함을 벗는 것, 불순해지는 것.. 이자벨의 첫경험이 이 모든 것을 상징한다. 

도발적이고 저돌적인 이자벨이 첫경험이었다는 것에 매튜는 놀란다. 사실 관객도 놀란다. 영화 도입부에서 벌거벗은 채 테오와 한 침대에 있던 장면에서 매튜과 관객 모두 지레짐작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미 선을 넘었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테오가 입으로 혁명을 이야기하듯, 이사벨은 표면적으로만 모든 타부를 넘은 척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침대 위의 남매의 모습이 의미하는 바는? 아늑한 자궁 속에 있는 태아다. 그들은 몸만 컸지 정신적으로는 아직 자궁(그들의 방)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너흰 매일 밤 같은 침대에서 지내.. 거기서 벗어나 다른 걸 보라고... 이렇게 하면 자라지 않아. 서로가 아이처럼 기대고 산다면 말야."

그러면서 매튜는 이사벨에게 데이트 신청을 한다. 그러자 이사벨은 테오 눈치를 본다. 마치 밖에 나가 놀다 오는 걸 허락받아야 하는 어린애 같다. 이에 매튜는 단호하게 말한다. 허락받을 필요가 없다고.. 어른이 된다는 건 누군가의 허락을 더이상 받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동시에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세상이 벗어놓은 허물을 바라보는 매튜와 이사벨. 이제 그들도 허물을 벗어야 하는 순간에 이르른다.


하지만 이들이 사랑하고 데이트하고 유희를 즐길 시간은 이제 끝나가고 있다. 세상은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한다. 단순히 시테마케크 원장의 해임에서 시작된 세상의 꿈틀거림은 거대한 파괴(성장)로 나아가고 있다. 이사벨은 말한다. 자신과 테오는 순수주의자여서 TV 를 보지 않는다고.. 이는 변명이다. 그들은 TV 를 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꿈틀거림을 보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TV 를 켜지 않아도 거리의 소리가 들린다. 더이상 이 거대한 흐름을 외면할 수 없는 순간이 온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그들은 각기 다른 선택을 한다.

"영원한 거 맞지? 그냥 영원하다고만 말해죠.."

영원히 함께하길 꿈꾸는 이자벨, 하지만 테오는 듣는둥 마는 둥한다. 이자벨은 불안해한다. 그녀가 불안한 것은 직감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영원히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을.. 이제 모든 게 변할 것이라는 것을.. 서로에게서 멀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급작스런 계기로 혁명의 거리 속으로 뛰어든 세 사람. 테오는 화염병을 집어들고, 매튜는 만류한다. 다른 방법을 써야한다는 것이다. 머리를 쓰고, 키스를 하는 방법. 매튜는 온건한 현실주의자다. 그는 세상을 바꾸는 것이 화염병이 아니라 현실 참여라고 생각한다. 정부에 화염병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정부일을 하는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진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 영화 도입부에 라이터를 가지고 하모니를 이야기하는 데서 그의 방식을 얼핏 이해할 수 있다. 라이터의 한 면이 여기에도 들어맞고 저기에도 들어맞는다는 그의 말에서 그는 변화보다는 조화와 적응을 중요시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온건하고도 느린 방식 말이다.

하지만 테오는 다르다. 그는 지금 당장 행동으로 변화를 이끌어야 한다고 믿는 급진주의자다. 그는 베트남 전쟁 거부 서명을 하지 않은 아버지를 비난한다. "시도 탄원서다." 라며 소극적 저항을 하는 아버지를 방관자라고 비웃는다. "혁명은 세련되거나 여유롭고 점잖을 수 없으며 온화함과 친절, 정중함, 그리고 고결함 따위와는 어울릴 수 없는 것이다." 라는 말에 동조한다. 혁명에 폭력을 사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래서 매튜와 그들은 그렇게 멀어져간다. 지금 이사벨은 테오와 함께 달려가지만, 이들 역시 언젠가는 멀어질 것이다.  어른이 된다는 건 혼자 걸어가는 것이다. 서로 다른 곳을 보면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결국에는..




Q: Would you say today’s youth are less passionate about politics than people were in the 60s?
(오늘날 젊은이들은 60년대 그들에 비해 덜 열정적이라고 생각하나요?)
Eva : Yeah. We’re much more cynical and we don’t really have great expectations and I can’t explain really why, but we don’t have ideals or dreams like they had at that time. As Bernardo says, we missed a bigger window on the future. For me, I’m not really involved with politics, I’m like Isabelle, I’m living in my cocoon with my classical music around.
(네. 오늘날 우리는 좀 더 냉소적이고, 거대한 열망같은 건 없죠. 그 이유를 정확히 설명하진 못하겠어요. 하지만 우리는 당시에 그들이 가졌던 이상이나 꿈이 없는 것 같습니다. 베르나도가 말하길, 우리는 미래로 향하는 큰 창을 잃어버렸다는 군요. 저 역시 직접 정치에 참여하고 있진 않습니다. 이사벨과 비슷하죠. 클래식 음악으로 둘러싸인 나만의 공만에서 살고 있어요.)           에바 그린 인터뷰 中


90년대 이후 청춘들은 어떤 모습일까? 10년, 20년 뒤 우리는 어떤 청춘으로 묘사될까..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 97년 IMF 이후 한국 청춘들의 지향점은 일제히 바뀐 느낌이다. 그 때 사회 분위기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금 모으기 운동이다. 이전 시대는 기존 정부에 대항하고, 저항하던 시대였다. 그런데 IMF 를 겪으면서 국민은 더이상 정부를 향해 화염병을 던지지 않는다. 대신 금을 모아다 주었다. 그리고 자본가들은 일자리를 제공해주는 은혜로운 자들,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애국자들로 둔갑한다. IMF 를 일으킨 주체 가운데 하나인 그들이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실소가 터져 나오는 일이다. 그래서 국산품을 애용하자는 구닥다리 문구가 천연덕스레 다시 등장하고, 그 틈을 노려 815 콜라라는 우스꽝스런 상품까지 등장한다. 그들은 그 와중에도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기에 여념이 없었건만..

그리고 젊은이들은 세상을 바꾸기보다는 하루라도 빨리 기존 세상 속에서 한 자리 얻고 싶어하기 시작했다. 싸워서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틀에 자신을 맞추어서 조금 얻어 먹는 방식을 선호한 것이다. 그러다보니 전전긍긍할 수 밖에 없다. IMF 시점 이후의 청춘은 응집된 거대한 폭발을 스스로 만들어 보지 못했다. 외부의 융단폭격만 받아봤을 뿐.. 스스로 내부의 힘을 밖으로 표출해 보지도 못했다. 겉으로는 시니컬한 세대로 보인다. 하지만 어쩌면 냉소를 가장한 집단 무기력증을 겪고 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