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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1

Lost and Delirious (상실의 시대) :길을 잃다. 그리고 미쳐버리다.

by R.H. 2009. 8. 17.


개인적으로 영화 포스터 참 마음에 안 드네요.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하고 영 딴판인데다가 영화는 하나도 에로틱하지도 않은데 저 단어 집어넣은 의도는 뭔지..영화가 10점 만점에 10점이라면, 포스터는 1점. 여하튼,
 

영화는 서정적이면서도 격한 감정을 뿜어내고, 감각적이다. 특히 폴리의 절규는...영화 전반부에서 펜싱 장면. 폴리의 경쾌하고 발랄한 웃음 소리. 그러나 영화가 끝난 후 폴리의 그 발랄한 웃음 소리가 슬프게 느껴진다.
 

메리의 독백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메리의 아버지는 재혼했고, 새엄마는 메리를 싫어해서 반강제적으로 기숙학교로 전학 오는 것 같다. 그리고 룸메이트인 폴리와 토리가 있다. 메리는 이들 관계를 매우 가까이서 ,동시에 한 걸음 물러나서 지켜보고 있다. 그들의 관계에 가치 판단 따위는 하지 않는다. 하나의 꿈처럼 느끼며 그들의 이야기를 지켜보고 있다.
 

그런데 이 세 인물은 왜 길을 잃은 걸까? 왜 미쳐버린 걸까? 이제 이들이 이야기를 하나씩 살펴보자. 그리고 이들이 각각 다른 결론에 도달한 이유는 무엇인지 한번 뜯어보자.


<스포일러 주의! 결말까지 다 적어놨음>
 

토리 빅토리아 : 놓치기 싫은 아늑한 평범함
 

토리는 그 나이 또래의 평범한 학생이다. 그녀의 엄마는 재혼을 한 건지 첩실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혹은 내 막귀가 못 알아 들었을 수도 있다.) 이것만 빼면 토리는 전형적인 중산층 가정에서 사랑 받고 자란 소녀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를 공주라고 부르고 애틋하게 대한다.

 

그런데 토리는 왜 폴리에게서 등을 돌릴 수 밖에 없는가?  토리는 손에 가진 게 많기 때문이다. 그녀의 풍족한 가정과 따뜻한 부모와의 관계, 졸업 이후 그녀의 삶 역시 상당히 순탄할 것이다. 폴리와의 관계가 절단 나는 게 가슴 아프고 괴롭지만 기존의 평온한 관계들과 보장된 미래를 내던질 수는 없는 것이다. 평온한 가정과 보장된 미래, 우리가 얼마나 간절히 원하는 것인가. 바른 생활 교과서에 나오는 모습의 가정, 그 평범함의 힘 말이다. 그 평범한 것만큼 아늑한 게 또 어디 있던가?


토리는 이 위대한 평범(결코 쉽게 얻어지지도 않는 것이기도 한 평범)을 버릴 수 없다. 우리는 이것을 얻기 위해 얼마나 시궁창을 뒹구는가? 토리를 비난할 수 없다.


폴리 오스테 : 어둠 속에 파묻히다.

 

폴리는 입양아다. 폴리가 말썽을 피워서인지, 양부모가 성의가 없어서인지, 폴리는 기숙학교에 몰리듯 온 것 같다. 폴리와 양부모의 관계는 상당히 나빠 보인다. 폴리가 묘사하는 그녀의 가짜 엄마 (양 엄마)는 웃음에 눈이 없고, 손은 차다고 한다. 한마디로 매우 가식적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 폴리는 입양 기관을 통해 친 엄마를 찾으려 하고 있다. 폴리가 말하길 친 엄마가 늙으면 자신이 업고 다닐 거란다. 폴리는 지금 친 엄마를 만날 기대와 희망에 부풀어 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폴리와 토리의 관계가 공개되고 난처한 상황에 처한다. 그리고 토리가 등을 돌려 버렸다. 폴리는 토리에게 집착하기 시작한다. 폴리는 토리와 달리 가정의 평온함이 없다. 지키고 싶은 보장된 미래도 없다. 지키고 싶은 것은 토리와의 관계다. 그래서 폴리는 토리를 붙들려고 안간힘을 쏟고 있다.
 

드디어 폴리는 입양 기관으로부터 편지를 한 통 받는다. 그런데 이럴 수가. 폴리의 친 엄마는 폴리와 연락하고 싶지 않단다. 그렇게도 학수 고대했던 친엄마에게서 이런 편지를, 그것도 제 3자인 입양기관을 통해 통고 받았다. 친엄마조차도 폴리를 거부한 것이다. 양부모도 그녀를 거부했고, 토리조차 거부하려 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거부당해도 계속 살아가는 이유는 그래도 누군가는 우리를 보듬는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 조건 없는 보듬음의 역할은 대부분 가족, 혈육, 특히 엄마인 것이다. 그런데 폴리는 생모에게서 두 번이나 버림 받았다. 이것이 폴리가 토리에게 더욱 집착하는 이유기도 하다.

 

이렇게 모든 관계에서 거부당한 폴리는 자살을 선택할 수 밖에 없다. 폴리가 자살을 결심한 결정적 이유는 토리에게서 버림받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친엄마에게서 완전한 버림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두 발을 지구상에 묶어두는 모든 관계의 끈들은 끊어져 버린 것이다. 그녀의 미래를 비추어 줄 자그마한 불빛조차 사라져 버린 것이다. 

 

매리 배드포드 : 희미한 사랑에 대한 불빛의 기억이 그녀를 구원하다.


메리의 친엄마는 3년 전 암으로 죽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재혼을 했고, 새 부인에게 홀딱 빠졌는지 메리를 기숙 학교에 보내 버렸다. 메리는 힘이 없고, 어두워 보인다. 토리처럼 발랄하지도 않고, 폴리처럼 격정적이지도 않다. 감정은 깊숙이 파묻고 차분히 주위를,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토리와 폴리의 관계를 바라보는 메리의 눈은... 글쎄 무념무상. 마치 꿈꾸듯 느끼고 있다.

 

메리 역시 폴리처럼 세상과 연결된 끈이 별로 없다. 그녀의 친 엄마는 죽었고, 아버지는 학부모 모임조차 오지 않는다. 학부모 모임에서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는 메리의 슬픈 표정, 혹은 분노일지도 모른다.

 

폴리가 자살하는 장면을 보자. 이때 메리는 자신의 죽은 엄마를 향해 독백한다. 죽기 전 자신에게 보여줬던 엄마의 순수한 사랑이 자신을 어둠 속에서 빠져 나오게 한 빛이었고, 자기를 구원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폴리에게는 그 빛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엄마를 향해 고맙다고 말한다. 영화상에서는 한번도 언급하지 않았지만, 메리 역시 끊임없는 자살 충동에 시달리지 않았을까 한다. 메리와 폴리의 차이점은 바로 저 희미한 불빛인 엄마에게서 받은 사랑의 기억이다. 메리의 이 작은 불빛에 대한 기억이 평생토록 그녀를 세상에 붙들어 놓는 끈이 될 것이다.

 

영화에서 가장 강렬한 모습으로 표현된 폴리. 하지만 그녀는 가장 나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내면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녀의 절규, 외침, 질주, 그리고 추락.


  영화 초반부에 메리가 전학 온 첫날, 기숙사에 놓여 있는 동상 위에 손을 올리는 장면이다. 그리고 그때 동상 뒤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인물이 폴리다. 이 동상은 어머니가 아이를 가슴에 품고 있는 형상이다.  메리와 폴리가 자살 충동을 받았을 때 서로 다른 결론에 도달한 결정적 이유는 바로 모성애에 대한 서로 다른 기억 때문이었다. 따라서 영화 도입부의 저 장면은 영화의 주제를 표현하는 중요한 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