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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1

세븐 (Seven,1995) : ...그리고 분노

by R.H. 2010. 3. 21.
 


<주의! 스포일러>


무관심이 미덕인 사회

'"Did the kid see it?"
"Who gives a fuck? He's dead. His wife killed him. Anything else, it has nothing to do with us."

영화의 첫 장면. 살인 사건 현장에 도착한 서머셋 형사는 대뜸 묻는다. 이 끔찍한 광경을 이 집 아이들이 목격했는지.. 이에 동료 형사는 어이없어 한다. 짜증과 신경질을 내며 욕지거리를 섞어 말한다. 아내가 남편을 죽였고, 그 외에는 상관할 봐 아니라고..  
 
이 도시는 타인에 대한 무관심이 미덕이 되어버린 곳이다. 서머셋 형사의 말처럼, 강도가 들면, '도와달라' 는 말 대신, '불이야' 를 외쳐야 하는 곳이다. 산책하는 사람의 지갑과 시계를 빼앗고는 느닷없이 눈을 찔러대는 곳이다. 원하는 것을 빼앗고 그냥 도망가면 되지, 눈은 왜 찌르는가.. 이곳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흉학한 마음이 제멋대로 분출되는 곳이다.
 


윌리엄 서머셋 : 무관심한 사람들에게서 멀어지고 싶다

"I don't understand this place any longer."

그래서 서머셋은 이곳이 진저리 난다. 7일 후 은퇴하는 그는 이곳에서 되도록 멀리 떨어진 한적한 곳에서 농장을 일구며 살기를 소망한다. 어쩌면 인간에 대한 정이 완전히 떨어져 버렸는지도 모른다. 더 이상 사람들 속에 섞여 있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는 지식과 통찰을 지닌 인간이다. 너무 많이 알고, 너무 많은 걸 보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인간의 이해할 수 없는 악행을 너무도 많이 봐 버린 그는 지쳤다. 그는 현실을 외면하고 싶다. 적막한 밤에 창문 너머로 들려오는 거리의 고함, 욕설, 사이렌 소리.. 어렴풋이 들려오는 도시라는 지옥의 소리를 듣고 싶지 않은 그는 메트로놈을 켠다.

그래서 한 때 함께 살던 여자가 임신했을 때, 그는 관계를 지속할 수 없었다.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이 세상에 아이를 낳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두려웠다고 한다. 그만큼 그는 세상과 인간에 대해 비관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임신한 밀즈 형사의 아내에게 들려주는 충고 역시 어둡기 그지없다.


데이빗 밀즈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서머셋의 후임인 형사 밀즈.. 초강력 범죄만 다루는 그 자리를 자원한 사람은 여태 없었다. 그런데 밀즈는 바득바득 우겨서 그 자리에 온 듯 하다. 밀즈 형사는 의욕이 넘친다. 그래서 침착하지 못하고, 감정에 쉽게 휘둘린다. 그는 서머셋의 차분함과 대비되는 인물로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그래서 서머셋의 떠남의 항변에서 보이는 모순을 집어낸다.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한 사람들을 통탄해 하면서, 정작 자신은 더이상 이 사람들을 상관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서머셋에게 당돌하게 '당신에게 동의하지 않는다.' 고 말한다.

그날 밤 서머셋은 메트로놈을 집어 던진다. 타인의 방관을 비난한 그 역시 타인을 방관한 것은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런데 의욕이 넘치고 감정에 쉽게 휘둘리는 사람의 단점은 자신을 과신한다는 점이다. 서머셋의 말처럼, 이 사건은 초보인 밀즈가 감당하기 어려운 사건이다. 그런데도 그는 이 사건에 달려든다. 그래서 밀즈는 범인의 덫에 걸려들고 만다.



존 도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들을 듣게 하려면 어깨를 톡톡 치는 것만으론 더 이상 안되지. 망치로 내려쳐야 그때서야 사람들의 주의를 끌 수 있어."

이웃집에 낯선 사람이 들락거려도..
옆 사무실에서 한 남자가 제 살을 도려내고 있어도..
1년 동안 한 남자가 말라 죽고 있어도..
누군가 끔찍한 물건을 만들어 달라고 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그래서 그가 찾아왔다. 서로에 무관심하고, 타인의 고통 따윈 아랑곳 하지 않은 이곳에..

영화에는 인간의 7가지 죄악을 다룬 책들이 나온다. 한마디로 옛 성현들이 말과 글로 설교한 것이다. 하지만 존 도의 말처럼 더 이상 이런 조용한 설교는 먹혀 들지 않는다. 학교 숙제가 아닌 이상 누가 케케묵은 고전 따위를 읽는단 말인가.. 인간들은 무관심하기 짝이 없기에 손에 책을 들고 있는 자의 말 따위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손에 총을 들고 나타나 피를 보여줘야 그제서야 눈을 돌린다.

"존 도" 는 한국말로 "아무개 씨" 처럼 신원미상인 자를 가리킨다. 영화가 끝난 뒤 크레딧이 올라 갈 때도 범인은 "존 도" 라고 나온다. 그가 자신의 신분을 감추기 위해 지문을 도려냈다고는 하지만, 그는 생포된 사람이다. 더 이상 "존 도" 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끝까지 그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 것은 바로 그가 하나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잡힐 수 없다. 제 스스로가 제 발로 나타날때까지.. 그의 말대로 어쩌면 그는 신의 선택에 의해 이곳에 보내졌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건이 종결된 후 가장 먼저 변한 것은 서머셋이다. "Far away from here." 라고 말하던 그는 이제 말한다. "I'll be around here."

<지옥에서 빠져나와 빛에 이르는 길은 멀고도 험하도다 -실락원>


분노 : 상황에 이르면 누구나 살인자가 될 수 있다 

존 도 : 창문이 없는 방에 나와 단 둘이 있고 싶을 테지. 나를 해치고도 처벌받지 않는다면 정말 행복하겠지?
밀즈 : 마음 아프구먼. 난 절대 그러지 않..
존 도 : 댓가를 치러야 하니까 그러지 않는 것 뿐이야.

우리가 살인과 폭력과 같은 범죄를 저지르지 않으려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우리 마음이 맑고 깨끗해서인가? 아니다. 존 도의 말처럼 처벌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운 사람을 두들겨 패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는다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우리는 언제나 범죄자가 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분노를 참지 못하는 자는 끝내 누군가를 죽이고 만다.

밀즈 형사는 살인자를 잡는 사람이다. 그런데 영화의 마지막에 형사는 살인자가 된다. 어차피 존 도는 죽은 목숨이다. 수십 년간 최악의 범죄만 다룬 서머셋도 처음 본 전대미문의 사건이다. 밀즈 형사 손에 죽지 않더라도 법정에서 그는 사형을 언도 받을 것이 뻔하다. 밀즈의 총에 죽던 사형을 받던 사실 별 차이가 없다. 존 도를 죽이려는 것은 바로 "분노" 이기 때문이다. 밀즈의 총에 죽는 것은 "개인"의 분노에 의한 것이고, 그가 사형을 받는 것은 "사회"의 분노에 의한 것이다. 한 사람이 분노하여 누군가를 죽이는 것은 살인죄가 되고, 다수가 분노하여 누군가를 죽이는 것은 정의가 되는가?

그래서 존 도는 비웃다. 과연 누군가를 죽일 수 있는 권한 따위가 있다는 건가? 누군가에게 죽음을 언도할 권한 따위가 있느냐는 것이다. 살인자를 잡는 형사조차도 순식간에 살인자가 된다. 누구라도 언제든 기회만 된다면, 살인자가 되는 것이다. 인간의 어리석음과 모순, 오만함을 실컷 비웃은 존 도는 그렇게 사라졌다..
 

P.S. 15년 전 영화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세련된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