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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소설

헨릭 입센 <유령, 1881>

by R.H. 2016. 8. 27.



<인형의 집>을 제대로 읽어본다면, 진짜 욕 먹어야하는 캐릭터는 "세상물정 모르고" 집을 뛰쳐나간 노라가 아니라, 찌질하고 위선적이며 가증스러운 남편이란 것이 분명히 드러난다. 그런데 세간 사람들이 <인형의 집>을 제대로 보지도, 읽지도 않고 욕 했던 듯하다. 그래서 입센은 <유령>에서 다음 장면을 집어넣었다. 


아르빙 부인의 테이블 위에 놓인 책. 목사는 눈쌀찌푸린다. 구체적으로 어떤 책인지 알려주진 않았으나, 당시 기준 진보적인 책이라는 뉘앙스다. 이에 아르빙 부인은 목사에게 그 책을 읽어보았냐고 묻는다. 하지만 목사는 세간의 비평만을 들었을 뿐, 읽어본 적은 없단다. 아르빙 부인이 왜 읽지도 않고 책을 뭐라하냐하니.. 굳이 이런 책을 읽을 필요까진 없고, 권위있는 사람들의 해석과 평가를 받아들이면 된다는 식이다.


<인형의 집>이 받았던 비난의 대부분이 그랬던 것이다. 실제로 극을 보지도, 극본을 읽어보지도 않은 사람들의 비난. 오늘날 실제로 영화를 보지도 않고, 어느 어느 부분이 거슬린다더라...하면 별점테러를 가하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다. 


그래서 그런지 <유령>에서는 문란한 남편, 성병, 정신병, 근친, 안락사 같은 파격적인 단어들이 등장한다. 이왕지사 이렇게 된거 쎄게 한번 나가보자 하신 듯. 인형의 집 결말에 대한 세간의 부당한 비난에 헨릭 입센의 빡침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진짜 빡치셨는지 입센은 <유령>에서 남편 캐릭터를 더 개새끼로 만들었다. 방탕하고 문란한 남편, 하녀를 농락하고 혼외자식까지 낳은 파렴치한으로...  


그런데 목사는 도리어 아르빙 부인을 탓한다. 가해자는 나쁘지만, 피해자도 나쁘다는 식의 논리를 전개한다. 방탕한 남편을 그저 "비틀거리는 자" 로 순화해서 표현하면서 정작 피해자인 아내는 남편을 심판하고, 비틀거리는 자를 내팽개친, 즉 아내의 도리를 하지 않은 여자라고 질책한다. 한마디로 아르빙 부인더러 썅년이라는 말을 짐짓 중립인 첫, 논리적인 첫, 신사인 척 늘어놓는 것이다. 목사는 전통의 수호자다. "낡은 미신" 즉 유령을 지키는 자다. 그가 아무리 세련된 엘리트의 언어를 구사하고, 평화와 질서를 추구한다해도 본질적으로 그는 실체없는 낡은 미신, 유령의 사도다. 


<유령>에서 아르방 부인은 이 낡고 허물어져가고 썩어가는 집구석을 지켰다. 방탕한 가장의 모습을 자식에게 보여주지 않기 위해 어린 아들을 외국으로 일찍 유학보내고, 지역에서 남편의 평판을 좋게 하기 위해 여러 가지 사회사업도 남편의 이름으로 벌렸다. 현재 건립중인 고아원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죽은 남편의 기념비까지 세워진 판국이다. 


이렇게 썩어문드러진 집구석을 갖은 노력을 다해 수호한 결과는 무엇인가. 남편은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한 채 삶을 방관하고 비틀거리기만 하다 생을 마감했다. 아들은 아버지의 병을 육으로나 영으로나 물려받았다. 아비가 저지른 죄악을 알지도 못한 채, 이복동생을 사랑하기까지 한다. 이 파국의 원인은 그들 모두가 무의미한 의무에 얽매여있었기 때문이다. 남편, 아내, 부모, 자식 이라는 강요된 역할과 의무에 짓눌려 모든 것이 일그러진 것이다. 직접적인 피해자인 아르빙 부인만이 아니라, 그녀의 남편과 자식 역시도 강요된 의무로 삶이 일그러져버린 피해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