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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소설

오로네 드 발자크 <고리오 영감, 1834>

by R.H. 2016. 9. 10.


젊은이의 양지 - 외젠 라스티냐크


외젠은 예전 한국 드라마 단골 주인공같은 인물이다. 가족들의 온 기대를 걸머지고 시골에서 상경한 대학생. 소 판 돈으로 대학 보내는 뭐 그런.. 해서 그는 경계인이다. 그의 현재는 시골과 도시의  사이에 있다. 화려한 사교계를 기웃거리는 구질구질한 하숙집의 가난한 법대생. 그는 "찌든 가난과 권태, 죽어 가는 노인과 공부에 얽매인 한창 때의 젊음, 이런 것뿐" 인 이 끔직한 곳에서 벗어나고 싶다. 성공하고 싶다. 출세하고 싶다. 동시에 시골의 인간이었던 그는 근면 성실한 삶, 정직한 노동의 삶을 여전히 희망하기도 한다. 그는 루비콘 강 앞에서 욕망이 질주하는 삶 속으로 달려들어갈지 말지 결심해야 하는 경계의 지점에 서 있는 것이다.


그가 바라는 성공은 판검사 따위가 아니다. 어중간한 성공은 싫다. 그 이상을 원한다. 가장 높은 곳을 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교계라는 이너서클에 들어가야 한다. 그 이너서클에 들어가기 위해선 마차과 화려한 의상이라는 입장권과 빽이라는 초대장이 필요하다. 그는 이 두가지를 가족을 통해 조달한다. 연줄은 고모를 통해 어찌어찌 잡았는데.. 문제는 돈이다. 가족들이 허리띠를 졸라매며 쪼들리게 산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는 가족에게 더 많은 돈을 요구한다. 물론 너무도 미안해한다. 하지만 미안해한다 해서 착취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미안해 하면서도 그는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그들을 착취한다.


발자크가 다시 쓴 리어왕 - 고리오 영감


고리오 영감과 그의 두 딸 사이에도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착취가 벌어진다. 고리오 영감은 왕년에 밀가루 공장과 국수 공장을 운영한 부르주아로, 사업에 있어서는 민첩한 사람이다. 판 돌아가는 상황을 잘 파악하고, 그 속에서 기회를 잡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는 사업 이외의 부분에서는 맹한 호구다. 이런 그의 불균형을 가다듬어줄 능력이 있었을 듯한 그의 부인은 일찍 죽어버리고, 그에게는 아름다운 두 딸만이 남는다. 그는 이 두 딸을 맹목적인 사랑으로 키우고, 거액의 지참금을 손에 쥐어주어 큰 딸은 백작에게, 둘째 딸은 은행가에게 시집보낸 뒤, 이 구질구질한 하숙집에서 쓸쓸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 두 딸은 아버지의 등골을 빼먹기만 하고는 내팽겨쳐 버린 것이다. 그야말로 리어왕의 그것이다.


"돈이란 바로 삶이야. 돈이면 안되는 게 없지"


그런데 고리오 영감이 불쌍하고 가련한 피해자이기만 할까? 그가 딸들에게 보여준 맹목적 사랑이 과연 사랑이기는 했을까? 사실 두 딸을 망쳐놓은 것은 고리오 영감이다. 딸들을 대하는 그의 기이한 행동들은 아이돌 덕후의 그것과 같다. 그는 딸들을 덕질했던 것 뿐이다. 자신의 돈으로 딸들의 관심과 애정을 사려했던 것이고, 그 역시 이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돈이 바로 삶이고, 돈이면 안 되는 게 없다는 고리오 영감의 저 외침은 그의 본질을 명확히 보여주는 말이다. 그리고 더이상 딸들에게 돈을 줄 수 없게 되자, 딸들 역시 눈곱만큼의 애정도 돌려주지 않았던 것이다. 누가 과연 가해자이고 피해자일까. 그들은 애정을 돈으로 서로 교환하고 있었던 것 뿐인데... 결국 이 교환이 더이상 이루어지지 않게 되자, 고리오 영감은 딸들을 향애 폭언과 저주를 퍼붓는다.


"나는 개처럼 죽게 되는 건가? 버림받는 것, 이게 바로 나에게 주어진 보상이군. 염치없는 년들, 못된 것들, 난 그년들을 증오하고 저주해. 밤이면 관에서 벌떡 일어나 그것들을 다시 저주하려네"


고리오 영감에게서 보이는 더욱 뜨악한 점은 그의 지독한 이기주의다. 보트랭이 갑자기 졸도하여 사람들이 부축해 방으로 옮기는데, 고리오 영감은 자신은 여기에 필요하지 않다며, 도와주지도 않고 나가버린다. 또한, 보트랭이 사실은 탈옥수였고, 그를 체포하기 위해 하숙집이 한바탕 난리가 났으며, 타유페르의 아들이 죽었다는데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


"그래서!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오? 나는 자네 집에서 내 딸과 저녁을 먹을 거라고, 알겠소? 딸이 기다리고 있다니까. 자, 어서 오라고!"


그는 세상이 뒤집어졌다해도 전혀 개의치 않을 인간이다. 당연히 저 먼 어느 곳에서 사람들이 굶주림과 고통에 비명을 질러대고 있어도 아랑곳하지 않을 인간이다. 그의 행복, 그의 기쁨, 그의 쾌락인 딸들과 저녁만 먹을 수 있다면 말이다. 그가 과연 동정받을 만한 인물인가? 못된 딸년들에게 이용만 당하고 버림받은 불쌍하고 가련한 인물인가? 고리오 역시 자신의 욕망만을 충족시키기 원하는 자였는 걸..


효녀 심청-빅토린


빅토린 타유페르와 그녀의 아버지 타유페르 사이의 착취는 가장 고약하다. 여기서는 아버지가 딸을 착취한다. 딸에게 마땅히 돌아가야 할 그녀의 엄마가 남긴 유산을 모조리 빼돌려 아들에게 몰아주고, 딸은 내쳐버린다. 빅토린은 심청이다. 이런 악랄한 아버지를 여전히 사랑하고, 원망조차하지 않으며, 그 어리석은 눈을 뜨게 해달라고 기도까지 한다. 


심봉사와 타유페르는 근본적으로 같은 인간이다. 딸을 착취하고 내다버린 아버지들..  심청이는 1차적으로는 용왕의 도움을 2차적으로는 임금의 도움을 받아 불행에서 탈출하고 아버지를 되찾는다. 그러나 신은 빅토린의 기도를 들어주지도, 도와주지도 않는다. 심청이처럼 임금님이 짠하고 나타나 구원해주지도 않는다. 이 불행한 여인을 구원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보트랭이라는 악당이다. (빅토린은 악랄한 아버지이긴 하지만, 유산이라도 상속받으니 아버지와 관계회복을 마다할 이유가 없으나, 심청이는 도대체 왜 지 애비를 그렇게도 찾았을까.. 심청전은 폐기되어야 할 위험하고도 악랄한 이야기다.)


사탄의 유혹 - 보트랭


보트랭은 흔히 말하는 쾌남자다. 하숙집 주인에게 스스럼없이 '엄마' 라고 능청스럽게 구는 붙임성 좋은 사람이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아무데서나 이모 이모 하는 사람) "거침없이 화통한 사람" 이고, "호인같이 생겼지만 깊고 단호한 시선으로 남에게 두려움을 주는 인물" 이기도 하다. 그는 쾌활하고 능청맞지만, 시니컬한 현실주의자이며, 정작 자신의 이야기는 하지 않는, "불온한 과거의 냄새가 나는" 자다. 스핑크스와도 같은 자이며, 욥기에 등장하는 사탄과도 같은 자다. (사실 욥기의 사탄은 선입견을 배제하고 보면, 간지나는 냉소주의자의 모습을 하고 있긴 함) 그보다는 광야에서 예수를 유혹하는 사탄과도 같다. 광야에서 예수에게 세상 모든 것을 주겠다고 제안한 그 사탄 말이다. 


"만약 자네가 내 제자가 된다면 자네를 무소불위로 만들어주지. 그 어떤 욕망을 품더라도 바로 그 순간에 이루어질 걸세. 명예, 재산, 여자, 무엇을 원하든지 말이야. 문명 전체를 한 덩어리로 뭉쳐 자네에게 줄 수도 있네. 자네는 우리의 총애하는 자식, 귀한 막내가 될 것이며, 우리 모두는 자네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진이 빠지도록 일할 수도 있다네. 자네에게 장애가 되는 것은 뭐든 뭉개 없애 주지....자네는 내 은덕을 입고 싶지 않은 건가, 응? 입으면 또 어떤가?"


보트랭은 음모를 꾸며 타유페르의 아들을 결투에서 죽이고, 빅토린을 타유페르의 유일한 상속자로 만들려 한다. 그러니 외젠에게 빅토린과의 연애사업을 시작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녀가 받게 될 막대한 상속이 외젠의 수중에 저절로 떨어질테니까. 이런 보트랭의 사악한 제안을 외젠은 뿌리친다. 누군가를 죽여서 돈을 낚아채다니.. 그가 아무리 성공과 출세에 목말랐다해도 이런 꺼림침한 일에 말려들고 싶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면 외젠은 결국 보트랭의 세계관 속으로 빨려들어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망설이며 경계에 서 있던 외젠은 고리오 영감을 둘러싼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인간의 모든 천한 본성을 낱낱이 확인한 것이다. 외젠은 예수가 아니다. 예수는 인간의 천한 본성, 욕망과 탐욕, 배신을 모두 알면서도 끝까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지만, 외젠은 인간인 것이다. 


모두가 돈을 얻기 위해, 쾌락을 얻기 위해,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달려가고 있을 뿐이란 걸 확인한 풋내기 대학생 외젠 라스티냐크는 더이상 경계에서 망설이지 않는다. 인간 사이에 가장 근본적인 애정 관계인 부성애와 효심 따윈 허상일 뿐이라는 걸 목도한 그는 더이상 "순수한 마음, 거룩한 감정" 을 갖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이미 루비콘 강을 건너갔다. 파리라는 욕망의 진흙탕 속으로 돌진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혼자 남은 라스티냐크는 묘지의 높은 언덕 쪽으로 몇 걸음 걸어 올라가, 등불이 켜지기 시작하는 센 강의 양쪽 기슭을 따라 구불구불 누워 있는 파리를 보았다. 그의 시선이 거의 탐욕스럽게 집착한 곳은...그가 뚫고 들어가고 싶어 했던 그 멋진 사교계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었다....."자, 이제 파리와 나, 우리 둘의 대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