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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소설

헨릭 입센 <인형의 집, 1879>

by R.H. 2016. 8. 27.



몇 달후면 은행장에 취임하는 남편, 그리고 그의 아내 노라. 전형적인 도시 중상층 가정의 이 여자는 낭비벽이 꽤 심한 듯하다. 짐꾼에게도 넉넉한 팁을 주고, 아이들을 위한 선물을 이거저거 사대는 걸 보니 말이다. 남편이 크리스마스 선물로 뭘 원하냐는데, 돈을 달라하는 걸 보니, 확실히 돈을 좋아하는 여인인가보다. 남편은 이런 여자를 귀엽게 바라보고 "종달새"라 부르며 사랑스러워한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가짜다. 그녀는 이른바 "개념녀" 다. 몇년전 남편이 죽을 병에 걸렸을 때, 남편의 요양비를 구하기 위해 쩔쩔맨 적이 있다. 그 시대에 여자는 단독으로 대출을 받을 수 없었기에 보증인이 필요했다. 해서 친정 아버지 서명을 자기 임으로 해서, 크로그스터란 자를 통해 돈을 융통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남편에게 숨겼다. 남편이 알면 자존심 상할 일이기 때문이다. 해서 그녀는 생활비를 아끼고 아껴서 돈을 갚아나갔다. 하지만 남편에게 드는 돈은 아낄 수 없다. 남편 기죽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드는 돈 역시 아낄 수 없다. 이건 스스로가 용납하지 못하는 일이다. 결국 그녀는 남몰래 자신에게 드는 돈을 아끼고 아꼈다. 가장 싼 옷, 가장 싼 물건..


오늘날에도 이런 개념녀는 칭송의 대상이다. 남편(혹은 남친) 기죽을 까봐 지갑에 몰래 돈 넣어주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돈 한푼 쓰지 못하는 여자. 그런데 이게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 바보짓인지를 입센은 <인형의 집>에서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이 짓 하지 말라고 한다. 왜 바보짓인지, 왜 멍청한 짓인지 한번 보자.


크로그스터는 비열한 놈인데, 남편과 사이가 대단히 좋지 않았다. 해서 남편은 은행장 취임에 앞서 이 놈부터 해고하려든다. 그러자 이 놈은 노라를 협박한다. 노라가 임으로 친정 아버지의 서명을 했던 위법 행위를 세상에 까발리겠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된 남편은 노발대발이다. 사랑스런 종달새는 갑자기 "위선자, 거짓말쟁이, 아니, 더욱 더 나쁜 범죄자" 로 불려지고, "바닥을 알 수 없을 만큼 더러운" 여자로 불려진다. "종교도 없고, 도덕도 없고, 의무 관념도 없는" 경솔한 여자라며 갖은 악담을 퍼붓는다.


이런 와중에 이 문제는 여차저차해서 해결이 된다. 남편은 차용증을 돌려받고, 그 자의 위협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그러자 언제 그랬냐는 듯 남편은 180도 태도를 바꾼다. 아내를 용서한다느니, 당신의 의논 상대가 되겠다느니, 가르침을 주겠다느니.. 더 가관인 것은 노라더러 안심하고 자기를 의지하라고 말하는 뻔뻔함이다. 자신의 커다란 날개에 숨겨준다느니, 사나이 마음이 어쩌고 저쩌고.. 세상에 이런 찌질이가 어디있을까 싶을 정도다.


남편이라는 작자의 위선과 하찮은 마음을 확인한 노라는 차갑게 변한다. 그리고 조목조목 따지기 시작한다. 자신이 그동안 부당한 취급을 받아왔다는 점, 이 집에서 자신은 인형에 불과했다는 점, 무엇보다 위험이 닥치자, 커리어에 조그마한 스크라치라도 날까봐 부들부들 하는 남편의 이기심, 위험에서 벗어나자 짐짓 사나이다운 모습을 뽐내는 위선...무엇보다도 그녀를 가르치려드는 그의 오만함.


이 모든 것을 두눈으로 확인한 그녀는 뒤도 안 돌아보고 이 집을 박차고 나간다.


이 결말에 대해 당시에 입센은 어마어마한 욕을 쳐드셨다고.. 요즘 시대에도 결말에 대한 냉소를 종종 듣는다. 노라가 무턱대고 집을 나가서 어쩌겠다는 건가. 당시 여자가 할 만한 일이 있겠는가. 노라는 창녀나 되었겠지. 대단히 현실적인 듯, 쿨한 듯 말한다. 하지만 아니다. 극 중에서 란데 부인은 취업을 부탁하고 은행에서 사무직을 하기로 되어있었다. 그러니까 당시에도 여성들이 힘겹긴 하지만, 직업을 가질 수 있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노라가 무턱대로 거리로 나간 건 아니고, 일단은 친정으로 가겠다고 했다. 친정은 여러 정황상 중상층 부르주아에 속하니, 스스로 일어서겠다는 강한 의지를 가진 노라라면, 충분히 세상에서 자기 자리를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당대든 요즘이든, 이렇게 빙글빙글 돌면서 이 작품을 비난했는데, 사실 비난하는 사람이 가장 격분했던 부분은 노라의 가출보다, 남편의 찌질함, 쪼잔함, 위선적 행위를 입센이 마구 까발렸다는 점이었을 것이다. 남자의 체면과 위신을 이렇게도 깍아내리는 헨릭 입센은 전통 질서의 수호자들에게 반역자, 그 이상이었을 것. 또한, 자식을 팽개치고 자아를 찾아 떠난 여자라는 점도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모성애라는 그 지독하게 금기시되는 전통의 단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팽개치는 여자라니..


"내 귀여운 작은 새는 절대 그런 일을 해서는 안돼요. 작은 새는 깨끗한 주둥이로 노래나 부르는 것이지, 만들어낸 소리 따윈 내서서는 안 돼요."


무엇보다 노라가 자신의 목소리를 내었다는 점이 전통의 수호자들 입장에서는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노라는 인형의 집에 갇혀사는 작은 새였다. 노래나 부르고 사랑이나 받으면 그만이지, 자기 목소리, 자기 주장을 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당시의 시대상이 그랬다는 것이다. 근데 이게 과연 1879년만의 생각이긴 한 걸까..


여튼 노라의 가출이라는 결말에 어마어마한 욕을 먹은 입센은 빡쳐서, 노라로 대변되는 억압받는 여성이 가출하지 않고, 전통적인 가정을 지키면, 어찌 되었을지를 이야기한 <유령> 이라는 후속작을 내놓으셨다. 이건 다음 포스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