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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소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열차 안의 낯선 자들, 1950>

by R.H. 2016. 8. 23.




가이는 전형적인 모범시민이자 전도유망한 건축가다. 삶에 목표가 있고, 인생을 계획하는 인간이다. 그야말로 "그럴리 없는" 사람의 전형이다. 반면에 브루노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인간이다. 삶의 목표도 없이, 되는 대로 사는 휘청거리는 인간이다. 이렇게 정반대의 인간인 두 사람이 열차 안에서 우연히 만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런데 과연 이 두 사람이 완전 정반대의 인간이기만 할까. 과연 그들의 만남이 우연이긴 한 걸까. 인간은 자신과 같은 유형의 인간을 단박에 알아본다. 자기와 같은 상처를 가진 인간, 같은 고통을 가진 인간, 같은 적의를 가진 인간을 말이다. 브루노와 가이의 만남이 겉 보기엔 우연인 듯 하지만, 실은 본능적으로 끌린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살의를 가슴에 품은 브루노는 가이의 숨겨진 적의를 알아본 것이다. 



"바로 그 점이 당신이 잘못 생각하는 거예요. 사람이라면 누구든 살인을 저지를 수 있어요. 순전히 상황때문인데, 그 사람의 기질과는 아무 상관이 없지요. 극한의 상황에 처하면, 아주 사소한 것으로도 그 경계를 넘어서버리니까요. 누구든 마찬가지예요."



누구나 살인할 수 있다는 브루노의 주장을 가이는 끊임없이 부정한다. 살인이라니.. 살인이라니.. 꿈에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단어다. 자신의 삶을 어질러놓은 아내 미리엄과의 이혼은 매끄럽게 진행되고 있질 않다. 한 남자에 속해 살 수 없는 이 여자로 인해 받은 고통.. 이 여자는 가이의 삶을 현재도 미래도 질척거리게 만들고 있다. 그렇다 해서 살인같은 무시무시한 생각은 하늘에 맹세코 해본 적이 없건만, 기차에서 만난 브루노라는 휘청거리는 인간은 대뜸 살인을 제안한다. 그러니까 브루노는 미리엄을 죽이고, 가이는 브루노의 아버지를 죽이는.. 그러면 완전 범죄가 된다는 것이다. 어디 말이 될 법한 소리인가. 가이는 이 제안을 뿌리치고 객실에서 나와버린다.



하지만 브루노는 제 멋대로 미리엄을 죽이고, 몇달 뒤 가이를 협박한다. 너도 네 몫의 살인을 하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가이를 미리엄의 살인범으로 누명씌우겠다면서. 급기야 브루노는 가이의 새 직장과 가이의 약혼녀에게까지 협박 편지를 보내고, 가이는 궁지에 몰린다. 



그리고 결국... 사람의 기질과 상관 없이 궁지에 몰리면 누구든 살인할 수 있다는 브루노의 말은 증명되고 만다. "그럴리 없는" 대부분의 우리는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 그런데 과연 단순히 상황에 몰린 것 때문이었을까. 가이의 마음 한 구석에 살인에 대한 욕구가 과연 없다 말할 수 있을까.



"가이는 자신이 그 권총을 왜 가지고 있는지 정확히 알았다. 살인을 저지른 그것은 바로 그의 것, 그의 일부, 제 3의 손이었던 것이다. 열다섯 살때 그 권총을 샀던 사람도 그였고, 미리엄을 사랑한 사람도 그였고, 시카고에 살 때 그 권총을 보관하면서 마음 깊이 무척 만족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사람 역시 그였다."



그렇다. 15살때부터 권총을 사서 보관하던 가이. 그리고 그 권총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던 가이. 그 어두운 본성, 그 어두운 욕망.. 누구나 가슴 속 깊이 묻어두고 있는 이 무서운 감정. 브루노는 가이가 숨겨둔 이 어둠이 튀어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가이가 열차 안에서 "우연히" 만난 낯선 자는 자신의 삶을 파멸로 몰고갈 악마가 아니라, 가이 자신의 분신이었던 것이다.



"내가 누구냐고? 바로 너야." 브루노는 마침내 그렇게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