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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소설

도스또예프스끼 <영원한 남편, 1870>

by R.H. 2016. 8. 15.




39세의 벨차노프는 건장하고 잘생긴 외모에 쾌활함과 명랑함, 그리고 화술까지 갖춘 멋진 남자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우울증에 빠진다. 사소한 유산 상속 소송에 발목잡힌 것이 우울증의 발단이다. 그러나 소송 사건이 신경 거슬리는 건 사실이지만, 쾌활하고 건장한 그리고 평생을 활달하게 산 남자가 밑도끝도 없이 느닷없이 우울증에 빠져들 정도로 대단한 일은 아니다. 아마도 작은 성냥불이 산불을 일으키듯, 이 사소한 사건을 시작으로 걷잡을 수 없는 우울의 구렁텅이에 빠진 듯 하다.



이때 불현듯 나타난 정체불명의 남자. 모자에 상장(喪章)을 달고 나타나, 우리의 주인공 주위를 배회하는 남자, 빠벨 빠블로비치.... 그는 벨차니노프가 한때 사랑했던 유부녀 나탈리아의 남편인데, 나탈리아는 얼마전 사망하였다는(그래서 그의 모자에 상장이 달려있다) 소식을 전하고, 그들 부부사이에 리자라는 딸이 있었다는 사실도 알려준다. 근데 리자의 얼굴을 보는 순간 벨차니노프는 단박에 이 아이가 자기 딸임을 알아챈다. 하지만 자존심 강하고 허약한 이 소녀는 불행히도 벨차니노프를 만난지 1주일 후 급작스레 병으로 사망한다. 



사실 빠벨 빠블로비치가 뻬쩨르부르그에 나타난 이유는 바가우또프라는 나탈리아의 또다른 정부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를 만나려는 목적은 아마도 복수를 위한 것인 듯 하다. 그런데 그는 빠벨이 온지 얼마 안되어 사망했던 것. 그리고 바가우또포의 장례 기간 도시를 배회하던 빠벨은 우연히 벨차니노프를 만난 것이다.



모자에 상장을 달고 나타난 빠벨 빠블로비치는 하나의 상징이다. 아내의 죽음, 아내의 정부 바가우또프의 죽음, 그리고 그가 데려온 딸 리자의 사망... 그는 죽음을 몰고온 사나이인 것이다. 벨차니노프는 현재 깊은 우울증에 빠져있고, 겉으로 직접 표현한 적은 없지만, 삶에의 기대가 없어진 상황일 것이다. 어쩌면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자살에 대한 끊임없는 열망에 시달리고 있는지도 모를 일. 이런 그 앞에 모자에 상장을 단 죽음의 사나이가 나타나 "결산"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날 밤...



죽을 것 같은 흉부 고통에 시달리던 벨차니노프는 빠벨과 사투를 벌이고 빠벨을 제압한다. 이 사투 뒤에 벨차니노프는 거리로 뛰쳐나간다. 그는 상쾌한 기분을 만끽하고, 새롭게 태어난 느낌을 받는다. 빠벨이라는 죽음과 싸우고 뒹굴고 이 죽음의 사나이를 때려 눕힌 뒤, 우울에서 벗어나고 가슴의 고통에서 벗어난 것이다. 



".... 그는 거리로 나갔다. 그는 거리를 따라 걸으며 무엇인가를 기다렸다. 그는 그 누구라도 마주치고 싶다는, 모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몹시도 간절히 했다."



그리고 질질 끌며, 신경을 거슬리게 했던 재판을 끝내고 벨차니노프는 우울증의 수렁에서 빠져 나온다. 유산상속 소송에서 얻은 돈은 그다지 큰 돈은 아니지만, 승소를 통해 자신감을 회복하고, 대지를 다시 밟는 느낌을 얻으며, 새롭게 인생의 후반전을 시작한다. 



빠벨과 나탈리아 그리고 리쟈는 벨차니노프가 인생의 전반전을 마무리하면서 돌아보고 생각하고 후회하고 그리고는 정리를 해야하는 인생의 중간 결산 과정이었던 것이다. 인생의 전반기를 마무리하는 시점, 잠시 멈춘 때, 우울이 깊어진 때, 그리고 죽음의 유혹이 어른거리는 그때...그는 과거의 얼룩을 정리하고, 죽음을 제압하고, "일시적 낙오" 에서 벗어나 다시 대지를 내딛는다. 이제 인생의 후반을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