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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2

메이 디셈버 (May December, 2023) : 졸업

by R.H. 2024. 3. 15.

 

 

<강력 스포일러, 결말 포함되어 있음>

 

“It's the complexity. It's the moral gray areas that are interesting.” 

(복잡성이죠. 그것은 도덕적으로 모호한 영역이에요. 흥미롭죠.)

이것이 엘리자베스(나탈리 포트만)가 그레이스(줄리안 무어) 역할을 맡기로 한 이유다. 우리 역시 비슷한 감정을 가지고 이 영화를 따라간다. 세상에 무 자르듯 딱 갈리는 게 어디 있나... 선도 악도 아닌 모호한 영역은 너무 많다. 어쩌면 저들은 진짜로 서로 사랑한 것 아닐까. 그러니 그 험한 비난과 손가락질 속에서도 20년간 서로의 곁에 머무르는 것이겠지.. 사실 그레이스가 도가 넘는 비난을 받은 게 사실이다. 성별이 바뀐 셀 수 없이 많은 사건들은 단발성 뉴스로 지나치고 마는 것을... 여자가 가해자가 되었기에, 이 사건은 지나치게 오랫동안 세간의 지저분한 호기심이 되어, 연일 타블로이드 신문 1면 기사에 실렸고, 20년이 넘은 지금도 여전히 협박과 조롱이 담긴 소포 박스를 받는다.  

“Be Kind” 

그래서 선량한 이웃들은 그녀에게 친절히 대하고, 그녀가 공허한 시간을 갖지 않게 하기 위해 선의에 의한 케익 주문을 끊임없이 해준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아 하지만, 적막한 밤이면 흐느끼며, 곧 무너져버릴 것만 같은 그레이스의 모습에 우리 역시 안쓰러움을 느낀다. 사건 발생 당시의 형사 역시 그녀의 순진한 모습에 안타까움을 느꼈으니 말이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우리는 성범죄자 그레이스를 더더욱 이해하고 동정하게 된다. 그녀가 어린 시절 친오빠에게 지속적으로 성추행을 당해왔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면서 말이다. 

“I hope you didn't think that disgusting brother thing was real.”

(그 역겨운 오빠 이야기가 진짜라고 믿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영화가 처음부터 보여준(엘리자베스가 본) 그레이스의 모습은 거짓이고 연기였다. 친오빠 이야기로 아들 조지의 이해를 얻었고, 순진한 모습으로 형사에게 연민을 얻었으며, 불안정한 모습으로 이웃들의 친절을 얻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조를 손아귀에 쥐고 있었다. 이제 영화의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봐야 한다. 

“I don't think we have enough hot dogs."

분명 다음 장면에는 차고 넘치는 핫도그들이 있건만, 그녀는 냉장고 문을 열면서 핫도그가 충분치 않다고 말한다. 시작부터 거짓이다.  아니, 거짓이라기보다는 상황을 과장하는 말일 수도 있고, 조를 조종하는 말일 수도 있다. 원래 핫도그가 냉장고에 가득했다면 거짓이고, 진짜 부족했다면 즉각 조를 움직이게 한 것이니까. 여튼 이처럼 그녀가 자식들을 통제하는 모습은 곳곳에서 보여준다. 

 

첫 번째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 조지에게 거짓 어린 시절 이야기를 흘린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그녀의 강력한 자식 통제 스킬이다. 곧 대학에 갈 아들에게는 칼슘 부족이라며 우유를 강권하고, 첫째 딸에게 졸업식에서 체중계를 선물했던 것(살 빼라는 말) 은 그보다는 약한 수준의 통제다.

 

좀 더 복잡한 통제 스킬은 이번에 졸업하는 막내딸이 고른 드레스를 부드럽고 다정하게 뺀찌 놓는 모습에서 나타난다. 어깨와 등짝이 훤히 드러나는 드레스를 보며, ‘나 때는 그런 것 못 입었지만, 넌 모던 여성이니까.’라고, 말한다. 이 말 뒤 막내딸은 자신이 고른 이 드레스는 친구 거 하고 너무 비슷하다며, 어깨와 등짝이 가려지는 조신한 드레스로 바꿔 입는다. 상황은 너무 부드럽고 다정하지만, 흔들리는 막내딸의 눈에서 얼마나 엄마의 기분을 살피는지, 엄마의 속내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려 드는지가 역력히 드러난다.  

 

막내딸의 졸업식 드레스를 고르는 장면. 거울 속에 비친 그레이스의 모습. 두 개의 모습을 한 그레이스.

 

"Fainting Goat" (희생양)


조(찰스 메튼)는 일찍 성장했다. 일찍이 바쁜 부모 밑에서 어린 두 동생, 그것도 천식으로 아프기까지 한 동생을 돌보며 실질적인 가장 역할을 했다. 지금도 경제적으로 무능력하고, 정신적으로 나약한(척하는) 엄마(뻘 되는) 그레이스를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서포트하고 있다. 어엿한 중산층 가정으로 살면서 자식 셋을 대학에 보낼 정도면, 그가 얼마나 성실하고 책임감 있으며, 경제적으로도 능력 있는 사람인지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소년이다. 구부정한 어깨, 자신감 없는 말투, 동갑내기 다른 여자(엘리자베스)하고 말만 섞어도 ‘나 너 보고 있다'는 신호로 전등을 켜는 (엄마로 치환 가능한) 여자의 눈치를 보는 어린아이.. 영원한 미성년, 졸업하지 못한 아이... 

영화의 초반에 엘리자베스가 받은 와인의 상표다. 위험한 상황이 되면 기절해서 다른 가축들을 보호하는 ‘희생양' 역할을 하는 것을 페인팅 고트라고 한단다. 바로 조의 모습이다.  

 

"It's graduation" (졸업)

이 영화는 그레이스 자식들과 손주들이 고등학교 졸업을 코 앞에 둔 상황에서 시작해서 이들의 졸업식으로 끝이 난다. 그리고 그들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조.. 조는 취미로 나비 애벌레를 키워왔고, 이 날 아침 고치를 벗고 나온 나비를 날려 보냈다. 그리고 같은 시각,  그레이스는 사냥을 나갔는데... 조는 과연 나비가 되어 날아갈 수 있을까. 사냥꾼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조가 엄마(뻘 되는 여자)의 주머니에서 나오질 못하는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조가 가진 올바른 미덕들 때문이다. 그의 선량함과 책임감이 그의 발목을 조이는 족쇄인 것이다. 이 얼마나 큰 비극이란 말인가... 

 

"I thought about the kind of life we could have if things were different....But who knows what we would have been like then. or where. What tragedies we'd have to face along the way. What bad luck. This is not what I ever would have wanted. that our paths led us to this road." (다른 상황이었다면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았었을까...하지만 그때 우리가 어떻게 되었을지, 어디에 있었을지 누가 알겠나. 어떤 비극과 불운을 겪어야 했을지도 모르잖아. 이것은 결코 내가 원했던 것이 아니야. 그 길이 우리를 이 길로 이끌었다니...)

 

20년 전 그레이스가 조에게 보낸 편지를 엘리자베스가 읇조리는 장면에 나오는 대사 중 하나다. 그러니까 그레이스의 말이라는 것. 하지만 이 부분만 놓고 본다면, 오히려 조의 마음을 가장 강력하게 표현한 대사다. 책을 읽는 것은 나를 읽는 것이다. 타인의 글 속에서 내 마음에 깊이 가라앉아 있는 감정을 읽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편지들을 다 없앴어도 이 편지만은 조가 20년간 간직해 왔던 것이다. 자신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의 주인공은 조라고 생각함)

 

그렇다면 조는 나비처럼 날아갔을까, 날아갈수 있을까? 결말은 모호하게 끝났다. 마치 인셉션의 팽이마냥.. 하지만 나는 조가 지금 당장 날아가지는 못해도 곧 날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우선 그가 나비를 키워서 날려준 장면에서 그의 성장에 대한 욕망, 날아가고픈 욕망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엘리자베스와의 일탈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성장은 불순과 동의어다. 성장은 거역과 비밀을 동반한다. 그는 그레이스를 거역하는 불순한 행동을 한 것이다. 세 번째로, 조가 담배 피우는 장면에서 보여준 이중성? 혹은 거짓에서 볼 수 있다. 조는 분명 자신의 아버지와 같이 담배를 피우는 장면을 이전에 보여줬는데, 지붕 위에서 자기 아들과 담배를 피우면서는 담배를 피워 본 적 없다고 거짓말을 하고, 캑캑 기침하며 순진한 척하는 연기까지 보여준다. 이것은 바로 그레이스가 한 행동이다. 거짓과 순진함에 대한 연기.. 어른으로 성장은 천진난만하고, 상큼한 것이 전혀 아니다. 불순해지고, 거역하고, 비밀이 생기고, 거짓을 말하며, 가식을 보여주는 것. 바로 그것이다..

 


추가 

1. “I'm naive.” ...............”I’m secure.” 

특정한 이야기를 연기하는 배우(엘리자베스)는 삶을 통째로 연기하는 사람(그레이스) 앞에서는 한낫 애송이일 뿐.  

 

2. "It really matters how it looks."(어떻게 보이는지는 참 중요해요)

그레이스가 케익을 만들면서 하는 별 의미 없는 말이다. 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면, 보이는 모습과 실제의 모습이 다른 그레이스의 자기 고백처럼 느껴진다.


3. "Grace hunts all the time."

마지막 장면에서 뱀을 등장시킨 이유는 뻔하면서도, 좋은 설정. 범죄자에게 서사를 부여하지 말라는 요즘 말을 떠올리게 한다. 죽은 피해자는 말이 없고, 나약한 피해자는 주눅 든 조처럼 그 목소리가 미미하다. 그런데 세상은 범죄자의 뻔뻔한 목소리, 요란한 주장을 크게 틀어준다. 영화 속에서 조는 그레이스에게 자신이 너무 어렸던 건 아닐까..라는 말만 꺼냈는데도 그레이스는 길길이 날뛰며, “Who is in charge?”라고 외친다. 모든 책임을 피해자인 조에게 떠넘기는 것이다.

 

현실에서 흔히 보는 모습이다. 니가 꼬드겼잖아. 니가 여지를 줬잖아. 니가 결정했잖아. 니가 가자고 했잖아... 그레이스의 윽박지름에  조의 목소리는 다시 묻힌다. 그래서 엘리자베스가 연기하는 영화 속 그레이스는 뱀을 칭칭 감고 있다. 누가 유혹을 했고, 누가 가해자인지 명명백백하다는 것이다. 처음에 엘리자베스가 이 역할을 하려고 했던 동기인, 도덕적으로 모호한 지점(gray areas) 은 없다는 것이다. 가해자의 징그러운 욕망만 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