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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소설

막심 고리키 단편 <첫사랑>

by R.H. 2018. 1. 4.

 

 

 

"그녀는 있는 것만으로 살아갈 줄 아는 여자였다....생활의 고단함에 대해서는 별 것 아니라는 듯 모기라도 쫓듯이 손을 내저으며 가볍게 웃어넘겼다."

 

 

가난한 생활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화려한 여자. 하지만 자신이 바라는 화려함을 충족시켜줄 부유한 남자를 찾는 일 따윈 관심도 없는 여자. 귀족학교 출신의 배운 여자. 파리를 경험한 여자. 그러나 '그'와 함께 욕실에서 썩은내가 나는 싸구려 월세방에 사는 걸 신경도 쓰지 않는 여자. 궁핍을 고통스럽게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다. 이 여인은 아예 신경조차도 쓰지 않는다. 가난을 가볍게 웃어넘기는 여자.. 이 얼마나 매력적인 여인인가. 누군들 이 여인을 사랑하지 않겠는가. 그녀에게 삶은 거대한 축제다. 매일매일 새로운 마술이 펼쳐지는 삶이다. 그녀는 삶을 즐겁고 명랑하게 바라보는 긍정의 아이콘이다.

 

 

주인공인 '나' 역시 그녀의 이런 밝음을 사랑한다. 그녀가 재미 삼아 하는 '남자들 마음 흔들기'도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다. 물질적 어려움도, 그녀가 일으키는 가벼운 스캔들도 이들 관계에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그녀와 그가 함께 할 수 없는 차이가 있다. 그는 삶을 진지하게 바라본다...이 소설은 고리키의 자전적 소설이다. '고리키' 는 필명인데, 러시아어로 '고통'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렇다. 그는 고통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사람이다. 그것을 등에 짊어지고 가겠다고 선언한 사람이다. 하지만...

 

 

"고통이나 괴로움 같은 건 그녀에게 적이었다. 그녀는 불행에 대해서는 이야기조차 듣기 싫어했다" 

 

 

그녀는 자기 삶을 사랑과 평화의 관점에서 보았고, 타인의 삶도 사랑과 평화의 관점에서만 보고 싶어 한다. 굳이 불편한 얘기를 해야 하나.. 기분 상하게, 분위기 깨지게.. 그런 건 그냥 넘기고, 즐겁게 긍정 또 긍정 , 오케이? 이게 바로 그녀의 삶의 방식이다. 그녀 입장에서 고리키 같은 사람은 요즘 말로 프로 불편러다. 내 일도 아닌 남의 일에까지 고통과 불편을 느끼는 그를 이해할 수 없다.

 

 

"한번은 시장에 나갔을 때 경찰이 행색이 멀쩡한 노인을 때리는 모습을 목격했다. 애꾸눈인 그 유대인 노인이 상인의 고추냉이 한 다발을 훔쳤다는 것이다. 나는 거리에서 그 노인과 마주쳤다. 먼지를 뒤집어쓴 노인은 그림 속에나 있을 법하게 당당한 걸음으로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그의 크고 검은 눈은 찌는 듯 무더운 하늘을 엄하게 바라보고 있었고 터진 입에서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삼십 년 전의 일이지만 하늘을 향해 무언의 비난을 던지던 노인의 시선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삐죽하게 튀어나온 은빛 눈썹이 지금도 내 앞에서 바르르 떨고 있는 듯하다. 인간에 가해진 모욕은 잊히지 않는 법이다, 영원히!"

 

 

부당한 폭력을 목격한 뒤, 그는 우울과 증오심에 휩싸인다. 무력감에 시달린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불편부당함을 이야기하고, 기록하는 것 뿐이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를 들은 그녀의 반응은...

 

 

'아니 그래서 그렇게 정신이 나간 거에요? 아이고, 마음이 그렇게 약해서 어떻게 해요!' 그러곤 이렇게 물었다. "잘생긴 노인네라고 했어요? 애꾸라면서 잘생겼다니 말이 돼요?"

 

 

아아...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머릿속에서 다른 색깔의 회로가 도는 사람인 것이다. 머릿속이 핑크빛 꽃밭인 사람과, 머릿속에서 회색빛 고통의 회로가 도는 사람이 언제까지 함께 할 수 있을까. 이 절망감. 차라리 그녀, 그리고 그녀같은 사람들이 악랄하고 교활하다면 그저 미워하면 될 텐데.. 비난하고 욕하면 될 텐데.. 어쩌면 삶의 대하는 그녀의 발랄한 태도가 고통을 이야기하는 고리키, 그리고 고리키와 같은 사람들보다 더 바람직할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이것은 너무도 복잡한 감정이고, 더 큰 장벽이다.. 그들은 서로를 축복하고, 포옹한 뒤 헤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