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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소설

막심 고리키 단편 <스물여섯 명의 사내와 한 처녀, 1899>

by R.H. 2018. 1. 3.




"우리는 스물여섯 사람이었다. 아니, 축축한 지하실에 갇혀 있는 스물여섯 개의 살아 있는 기계였다"



축축하고 곰팡내 나는 지하실에서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빵을 굽는 노동자들. 이들은 유난히 힘든 일을 하고, 유난히 꾀죄죄하며, 유난히 헐벗었다. 그래서일까. 이들은 같은 건물의 노동자들에게도 무시당한다. 그런데 이 침울한 공간을 잠시 잠깐 밝게 만드는 순간이 있다. 바로 같은 건물의 자수점에 일하는 여공, 요컨대 미싱 공장 여공이 아침에 방문 할 때다. 



같은 건물의 노동자들도 무시하는 지하실의 구질구질한 남자들에게 아침마다 밝은 웃음을 건네는 타냐는 26명의 살아있는 기계들에게 여신 같은 존재다. 아침마다 '빵 하나만요^^' 하며 상큼한 미소를 보내는 이 아가씨에게 따끈한 빵 하나 건네는 것은  26명의 사내들에게 가장 큰 기쁨이다. 아이돌 스타에게 바치는 일종의 조공인 것이다. 



게다가 이 지저분하고 구질구질한 26명의 노동자를 무시하는 것은 다른 공장 노동자들만이 아니다. 옆 건물에는 이 빵 공장 주인의 또 다른 공장이 있는데, 그 공장은 버터가 들어간 새하얀 빵을 만들어 내는 곳이다. 그 공장 일은 이 지하실 일보다 수월한데도, 작업장은 훨씬 깨끗하고 급료도 더 많다. 그래서 그런지, 그 더 나은 작업장의 노동자들은 똑같은 사장 밑에서 똑같은 빵 만드는 일을 하면서도 이 지하실의 노동자들을 우습게 보고 상종도 하려 들지 않는다...



천민들도 따로 8천을 만들어 따돌리듯이, 노동자들도 자기보다 쬐금이라도 못하다 싶으면 이렇게 가차 없이 무시하고 따돌리고 짓밟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 최저임금 상승을 냉철하고 이성적 관점에서, 이익의 관점에서, 반대하는 것은 사용자들이겠지만, 실제로 최저임금 상승을 가장 '기분' 나빠하는 것은 최저임금보다 살짝 더 받는 같은 노동자 계층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느 날 버터 식빵 공장에 군을 갓 제대한 멋쟁이 하나가 들어온다. 헌데 이 젊고 쎄끈하고 잘생긴 이 남자가 아무도 상종하려 들지 않는 이 더럽고 후질구레한 지하실에 놀러 온다. 와서 하는 소리는 순 지 자랑이다. 그것도 여자들이 자기한테 그냥 들러붙는다는 그런 소리뿐이다. 자길 두고 두 여자 머리끄댕이를 잡았다느니,, 자기가 눈만 한 번 찡긋하면 다 넘어온다느니.. 그러면서 '아재들도 여기 여자들이랑 많이 즐기셨죠?' 라고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소리도 한다. 우리의 지하실 아재들은 웃어본다. 나도 남자다잉..하고 싶지만... 그 웃음에는 어색함과 당황스러움이 짙게 베여있다. 그러고는 결국 "우리 같은 사람들이 어디..." 라는 자기비하의 말을, 어쩌면 저 뺀질뺀질한 놈이 들으려고 했던 말을 할 수밖에 없다..저렇게 꼴뵈기 싫게 지 자랑만 하는 놈이 아니꼽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재들은 감사하는 마음이 더 크다.



"그렇게 멋진 사람이 우리를 찾아와서 함께 앉아 흉허물 없이 이야기를 나누다니...우리를 찾아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아아...같은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무시당하는 그들은 저런 개소리하는 놈이라도 찾아와서 친한척 해주는 것만도 고마운 것이다... 하지만 저런 양아치 소리도 하루 이틀이지.. 어느 날 지하실의 한 사내는 '뭐 그래봤자 잔챙이들이나 후리는 거지.. ' 라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살짝 쿠사리를 멕여 보는데.. 그러자 그 뺀질이는 즉각 반발한다. 지금 뭐라고 했쓰요? 그럼 대어는 누군데?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대어는 누구냐고요? 아재들은 소심하게 말해본다.. '타냐' 



뺀질이는 당장에 내기를 건다. '내가 2주 안에 타냐를 자빠뜨리겠다!!' 우리의 아재들은 초조하다. 아닐 거야, 우리의 여신 타냐는 절대 저놈에게 넘어가지 않을 거야. 그 초조와 긴장의 2주가 흘러가고 2주가 되는 마지막 날. 뺀질이는 다시 지하실을 방문한다. '아재들 몰래 함 보소, 내가 어뜨케 하는지.' 그러고는 그는 밖으로 나가 건물 튀켠으로 들어가는데.. 그 뒤를 잠시 뒤 따라 들어가는 타냐.. 얼마후 뺀질이는 의기양양하게 나오고, 타냐는 행복에 겨운 눈빛으로 몽롱하게 나온다.



"우리는 너나없이 일시에 문을 박차고 마당으로 몸을 던졌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휘파람을 불며 독기가 오른 채 사납고 거칠게 고함을 질러댔다....우리는 그녀를 둘러싸고 거칠 것 없이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더러운 욕설을 악랄하게 퍼부어댔다....그러나 우리는 왠지 그녀에게 손찌검만은 하지 않았다"



우리의 여신이, 우리의 아이돌이, 우리의 스타가 이럴 수는 없는 것이다. 연애질을 해도 되지만, 걸리지는 말아야지, 이럴 수는 없는 것이다. 분노한 아재들은 악플을, 아니 악담을 퍼붓는다. 이에 타냐는 매우 당황하고 두려워하는데.. 하지만 궁지에 몰린 그녀는 그들을 향해 돌연 외친다. 



"오, 이 더러운...이 역겨운 불량배들!"



그리고는 그들이 세상에 존재하지 투명인간마냥 밀어 헤치고 제 갈 길로 가버린다...저 26명의 아재들이 나쁜 사람들일까? 타냐를 대상화하고, 지하실의 꽃, 애완동물 취급한 저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일까? 타냐를 제 멋대로 좋아하고, 제 멋대로 우상화하고, 지들 맘에 안 든다고 온갖 욕설을 퍼붓는 저들이 나쁜 사람들일까? 아니면 아저씨들의 기대에 어긋나게 다른 남자를 만난 타냐가 나쁜 사람일까? 둘 다 아니다. 26명의 사내와 타냐는 서로가 필요한 것을 주고받았을 뿐이다. 막말로 아재들이 지나가는 여자한테 추근덕거린 것도 아니고, 타냐가 자기를 사랑해달라고 애걸한 것도 아니다. 그들은 그저 사랑을 줄 사람이 필요했고, 타냐는 사랑을 받아주는 역할을 했을 뿐이다. 그뿐이다.



"우리가 그녀를 사랑한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족했다. 인간은 때로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짓밟고 더럽히면서도 언제나 자시신의 사랑을 쏟아부을 대상을 필요로 한다...우리는 타냐를 사랑해야만 했다. 그녀외에는 그 누구도 사랑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특별히 아름다워서, 특별히 존귀해서가 그들이 사랑한 것도 아니다. 자신들의 회색빛 삶에 잠시나마 빛깔을 넣어주길 간절히 바라는 그 순간, 그 자리에 그녀가 있었을 뿐이다. 타냐 역시 그들이 보내는 찬사와 경외를 즐겼다. 서로가 기분 좋은 소꿉놀이를 하고 있었던 것 뿐이다. 그리고 그 소꿉놀이가 깨졌을 뿐이다. 



그래서일까. 26명의 남자들은 타냐를 욕하고 조롱하면서도 물리적 폭력은 쓰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그렇게 하면 자신들이 그동안 만들었던, 그리고 즐거워했던 그 작은 환상이 산산히 부셔져버리니까.. 성냥팔이 소녀가 작은 성냥을 키면서 가졌던 그 작은 환상.. 추위와 굶주림과 모욕 속에서도 자신의 영혼을 얇게나마 보호해주던 그 환상...그리하여 그들은 타냐에게서 물러난다. 



"우리는 마당 한가운데 진창 속에서 비를 맞으며 그대로 서 있었다. 태양도 없는 회색 하늘을 머리에 이고...잠시 뒤 우리는 우리의 축축한 돌구덩 속으로 들어왔다. 전과 다름없이 태양은 창문 틈으로라도 우리를 들여다보는 법이 없었고 타냐 역시 더이상 우리를 찾아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