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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1

마데이누사 (Madeinusa, 2006) : 마음 속 감시 카메라마저 사라진 후..

by R.H. 2010. 3. 8.


<주의! 결말 포함된 스포일러>

페루의 한 시골 마을. 집 주위에 쥐약을 뿌리는 한 소녀. 죽은 쥐를 발견한 그녀는 쥐새끼를 멀리 내동댕이친다. 이런 그녀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움이 하나 가득이다. 이것이 행운을 가져다 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영화의 시작 부분인 이 장면은 앞으로 벌어질 사건의 복선이다.

마음 속의 감시 카메라마저 사리진 다면..

예수가 죽은 후 부활하기 전 3일 동안, 인간이 무슨 짓을 하든 신이 볼 수 없다고 믿는 이 마을 사람들은 이 기간에 축제를 벌인다. 영화는 바로 신마저 사라져 버린 시간에 고립된 이 마을에서 벌어지는 기묘한 일들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가 비도덕적인 행동을 자제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법이 규제하기 때문이고, 이차적으로는 종교가 규제하기 때문이다. 법은 거리에 CC카메라를 설치하고, 종교는 우리의 마음에 CC카메라를 설치한다. 그런데 이 모든 규제가 사라져 버린다면? 법은 물론이요, 마음 속 감시카메라마저 사라져 버린다면? 그래서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벌을 받지 않는다면, 그 때에도 우리는 과연 선하고 도덕적인 행동을 할 것인가? 우리는 이런 상황에 놓여 본 적이 없다. 생각해 본 적도 없다. 영화가 신마저 사라져 버린 시간이라는 설정을 한 것은 절묘하다. 아무것도 거리낄 게 없는 상황에 놓인다면, 과연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할까? 이 시간이야말로 우리의 진짜 모습이 드러나는 시간이다.

이 기간 동안 마을 사람들은 흥청망청 먹고 마시고 춤춘다. 남의 집 돼지를 훔쳐가고, 남녀는 몸을 섞는다. 평소 딸을 취하고 싶었던 아버지는 신이 보지 못하는 이 시간을 이용해 딸을 범한다. 이 고립된 마을의 이상한 축제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바로 인간의 습한 욕망이 거침없이 터져 나오는 모습이다. 어쩌면, 이 마을은 우리 마음 속 어딘가에 습하게 자리잡고 있는 음침한 공간의 상징일지도 모른다..

마데이누사

이 영화의 제목은 주인공 소녀의 이름이다. 그녀의 아버지가 상표에 적혀 있는 Made in USA 를 보고 지어준 것이다. 딱 보기에도 무성의하게 이름을 지어줬다. 상표란 물건에 붙이는 표시다. 즉, 아버지에게 그녀는 하나의 물건이고, 소유물이다. 다락방에 모아놓은 물건들 틈에 갇혀있는 그녀의 모습은 바로 그녀가 물건들과 다를 바 없다는 의미다. 그러기에 아버지는 거리낌없이 딸을 범할 수 있다. 소유물이니까..

언제나 수도 리마로 도망가길 소망하던 그녀는 홍수로 이 마을에 머물게 된 도시 청년의 도움으로 마을을 떠난다. 헌데 그녀가 소중히 여기는 귀걸이를 깜빡 한다. 그녀는 귀걸이를 가지러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도망치다 말고, 그깟 귀걸이 찾으러 집으로 돌아가다니... 마데이누사는 왜 이리도 귀걸이 따위에 집착하는 걸까?

귀걸이와 죽은 쥐

그 귀걸이는 아버지를 버리고 수도 리마로 도망간 엄마가 남긴 물건이다. 즉, 그 귀걸이는 아버지에게는 불복종을 의미하고, 마데이누사에게는 탈출과 희망을 의미한다. 해서, 아버지는 그 귀걸이가 못마땅하다. 아니, 그걸 보면 화가 난다.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귀걸이를 부셔버린다. 동시에 부서진 귀걸이는 마데이누사에게 부서진 희망을 의미한다. 탈출이 좌절되는 걸 뜻하기 때문이다.

우리 눈에는 그까짓 부서진 귀걸이지만, 그녀에게는 희망이 부서지는 것이다. 그녀는 이것만은 견딜 수 없다. 결국 그녀는 쥐약을 아버지에게 먹인다. 영화 시작에 나온 독약을 먹고 죽은 쥐는 바로 이 마을의 우두머리인 시장이자, 한 가정의 가장인 아버지의 상징이다. 영화 초반에 그녀가 죽은 쥐를 보며 기분 좋아하던 모습이 무얼 의미하는지 이제 알게 된다. 시장인 그는 마을에서 벌어지는 이상한 축제를 주관하는 사람이다. 자신에게 불복종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다. 이런 아버지를 그녀는 쥐에 대입한 것이다. 그러니 죽은 쥐가 행운을 가져 온다고 생각한 것이고, 흡족해 했다. 죽은 쥐를 내동댕이치면서 대리만족을 느낀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가 그녀의 희망마저 부셔버리자, 그녀는 진짜로 아버지를 죽여버린다.

피해자가 가해자로.. 방관자가 피해자로..

자, 이제 귀걸이를 찾으러 간 마데이누사를 기다리다 못해 찾아나선 도시 청년은 마네이누사가 아버지를 죽인 것을 목격하고 경악한다. 헌데 이게 웬 날벼락인가.. 마데이누사와 그녀의 여동생은 이 청년에게 살인죄를 뒤집어 씌운다. 이 청년이 아버지를 죽였다고 악을 쓰는데..

마데이누사의 탈출을 도와주려던 청년을 졸지에 살인자로 몰아버리는 난데없는 결말이다. 이 갑작스런 결말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걸까? 그 의도가 뭔지 한 번 보자.

고립된 마을은 우리 사회의 축약판이다. 즉, 인간 사회는 끊임없이 희생자를 필요로 해왔다. 한 명의 희생자(마데이누사)가 그 사회를 빠져 나갔으니, 이제 이 마을은 새로운 희생자(도시 청년)를 원하는 것이다. 이 영화가 섬뜩한 것은 바로 어제의 희생자가 오늘의 가해자로 언제든지 변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을의 이상한 모습을 지켜만 보던 어제의 방관자는 오늘의 희생자가 되고 말았다.. 악의 순환이다.

P.S 딸을 범하는 아버지라는 내용은 위험(?) 하지만, 장면 수위는 매우 낮은 편. 직접적인 묘사도 거의 없는 수준. 굴 속 같은 공간에 사는 두 딸과 아버지 라는 내용은 이미 성경의 롯 이야기에 나온 것. 성경이 전체 관람가이니, 이 영화가 전체 관람가가 못 될 이유도 없을 것 같은데.. 그건 내 생각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