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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1

멀홀랜드 드라이브 (Mulholland Dr., 2001) : 상상이라는 몰핀

by R.H. 2009. 10. 24.

 

<스포일러 주의>

 

상상(꿈) 이라는 허가된 몰핀

 

우리 모두는 상상을 한다. 수면 속 꿈 일수도 있고, 눈 뜬 채 하는 공상일 수도 있다. 혹은 남이 만들어 준 상상(소설, 영화와 같은 이야기)에 취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상상하는가? 현실이 만족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현실의 질서 속에서 대부분 우리는 수동적인 피지배자다. 그래서 우리는 상상 속에 새로운 세계를 만든다. 그 속에서 우리는 질서의 지배자다.

 

계모에게 핍박 받는 신데렐라 이야기.. 현실의 신데렐라는 이 가혹한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없다. 하지만 이야기 속에서 주인공은 마술의 도움을 받고 왕자와 결혼한다. 왕자와 결혼했다는 말은 권력을 잡았다는 말이다. 현실의 신데렐라들은 핍박받는 피지배자지만, 허구 속의 신데렐라는 종국에 승리자, 지배자가 된다.

 

슈퍼맨류의 영웅 이야기.. 현실의 우리는 불합리한 폭력에 무참히 당하고, 고통 받는 사람을 돕고 싶어도 돕지 못한다. 현실의 우리는 그렇게 무능하고 불의에 굴복 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야기 속 슈퍼맨은 불합리한 현실을 한방에 해결할 수 있는 극강의 능력을 가진 절대 권력자다.

 

그리고 우리는 전문 이야기꾼들이 만들어낸 이야기에 취한다. 전문 이야기꾼들은 이야기(상상) 를 더욱 멋지고, 그럴싸하게 만드는 재주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신데렐라, 슈퍼맨류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이야기꾼들은 마약을 파는 꾼들이다. 물론 그 마약(상상) 은 합법이다.

 

그래서 베티(다이앤) 는 상상 속에 숨어든다. 자신이 만들어낸 이야기 속에 자신을 파묻어 버린다. 베티는 밝고 건강하고, 아름다우며, 뛰어난 연기력을 지닌 전도유망한 연기 지망생이다. 그녀는 리타(카밀라) 라는 낯선 여자에게 친절함을 베푸는 아름다운 심성을 지니고 있기까지 하다. 반면, 리타는 한없이 나약하고,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가엾은 여자다. 이것은 바로 베티의 상상이다. 베티가 만들어낸 상상의 세계에서 베티는 강자이고, 리타는 약자인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반대다. 카밀라(리타) 는 유명 여배우이고, 자신이 출연하는 영화에 다이앤(베티) 를 출연시켜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도도한 여자다. 그리고 진짜 다이앤(베티)은 초라하고, 인정받지 못하는 엑스트라급 연기자다. 카밀라의 도움 없이는 영화에서 작은 배역하나 맡기 어려운 약자라는 말이다.

 

상상(꿈) 에서 깨어나라

 

영화에서는 세 명의 안내자가 등장한다. 콧수염 모텔 주인, 베티의 옆집에 사는 루이스라는 늙은 여자, 그리고 카우보이. 이들은 베티를 깨우려는 존재들이다.

 

모텔 주인은 아담 캐셔 감독이 파산 상태라고 말한다. 그리고 두 명의 은행원이 찾아 왔는데, 그들은 당신(아담 캐셔)이 어디에 있든, 어디에 숨든 찾아 낼 거라고 말해준다. 여기서 아담 캐셔는 실제 아담 캐셔 감독이 아니다. 베티의 상상이 만들어 낸 인물이다. 따라서 베티의 상상 속 아담 캐셔는 베티 자신이다. 그리고 두 명의 은행원은 영화 시작에 나왔던 두 형사를 말한다. 따라서, 베티(다이앤)의 진짜 상황은 경제적으로 파산 상태고, 두 명의 형사에게 쫓기고 있는 것이다. 이 진짜 상황을 전달해 주는 사람이 바로 모텔 주인이다.

 

루이스 라는 늙은 여자는 "누군가가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어. 뭔가 나쁜 일이 일어나고 있어." 라고 베티에게 말한다. 여기서 "누군가" 는 바로 베티다. 상상 속 베티는 평온하기 그지없지만, 현실의 그녀(다이앤) 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고 경고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카우보이는 말한다. Hey pretty girl, it's time to wake up.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전화는 현실과 상상을 연결하는 수단이다. 이처럼 전화기를 통해 진실에 접근해 가는 방식은 "로스트 하이웨이" 와 유사하다. 또한, 금발과 흑발, 상상과 현실, 강자와 약자라는 대조적인 설정도 "로스트 하이웨이" 와 유사하다.>

 

This is the girl.

 

영화에서는 끊임없이 “바로 이 여자야” 라는 말이 나온다. 영화사 사장, 아담 캐셔 감독, 카우보이.. 이 말은 사실 다이앤(베티)이 청부살인업자에게 카밀라(리타) 사진을 건네면서 한 말이다. 카밀라에게 버림받은 다이앤은 질투와 증오로 가득차서 극단의 선택을 한다. 카밀라를 죽여버리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바로 이 여자야." 라는 말은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의 시작이기에, 이 말은 베티의 상상 속에서 끊임없이 맴돌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청부살인업자는 일이 끝난 것을 확인하라면서 파란 열쇠를 건네준다.  

 

베티의 상상 속에서 리타(카밀라)는 금발로 머리를 물들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베티(다이앤) 는 사라진다. 위에서 말한대로 베티의 상상 속 인물들은 모두 베티가 만들어 낸 인물들이다. 따라서 이들은 모두 베티 자신인데, 특히 리타의 머리를 금발로 염색한 부분에서 이것이 더욱 선명해진다. 그리고 금발의 리타(실은 다이앤) 가 이 파란 열쇠로 파란 상자를 연다.

 

다시 말해, 카밀라 살해가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배신감, 증오, 질투, 죄책감으로 가득 찬 다이앤(베티) 은 골목 귀퉁이에서 비참한 모습을 한 채, 웅크리고 앉아 파란 상자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상상(꿈, 허구의 이야기) 에 취한 이들을 깨우는 자들

 

포스트 시작에 이야기꾼들이 만들어내는 신데렐라, 슈퍼맨 스토리가 사람들을 취하게 만들고, 현실의 비루함과 고통을 잊게 만드는 몰핀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세상에는 심술궂은 이야기꾼도 있다는 점이다. 막막한 현실에서 도망쳐 멋진 이야기(상상) 속에 취한 이들을 향해 “깨어나라” 고, "정신 차리라" 고 말하는 이런 영화(이야기) 도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보고 싶어하는 것을 보여주기는 커녕, 보고 싶지 않은 비루한 현실을 사악하고, 불편한 방식으로 보여주는 고약한 심보를 가진 이야기꾼들..

 

깨어나기를 거부하는, 멀쩡한 정신으로 현실을 목도하기 거부하는 자의 최후를 이 영화는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24시간 상상 속에 파묻혀 살 순 없다. 그러기에 다이앤(베티) 은 영원한 잠을 선택한 것이다. 나약한 현실 도피자의 최후는 신데렐라처럼 왕자와 결혼하는 것도, 어느 날 갑자기 슈퍼맨이 되는 것도 아니다. 죽기 전까지 잔혹한 현실에서 도망갈 방법은 절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