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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1

데드 맨 워킹 (Dead Man Walking, 1995)

by R.H. 2010. 3. 25.

<주의 스포일러>


사형제 폐지와 관련해 언제나 거론되는 "데드 맨 워킹".. 어쩐지 손이 잘 가지 않는 영화였다. 이런 류의 영화가 보여주는 뻔한 설정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다. 불우한 어린 시절로 인해 범죄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거나, 누명을 쓴 거다, 라는 식. 혹은 "우셔야 합니다. 동정심을 보여 줘야 합니다." 라는 식의 감정의 강요.

하지만 잘못 짚었다. 이 영화에는 그런 게 전혀 없다. 매튜의 어머니와 형제들은 끝까지 매튜를 사랑한다. 매튜를 원망하거나 비난하지도 않는다. 불우한 어린 시절이라는 설정은 없는 거나 다름없다. 더더욱 맘에 드는 것은 만든 이가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동정심을 일으키는 억지 설정도 집어넣지 않았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사형수의 가엾고 여린 모습, 어딘가 모르게 순박해 보이는 외모.. 이런 거 없다. 되려 사형수 매튜는 한 눈에 보기에도 양아치다. 희밀떡한 눈빛하며, 내리깐 목소리는 비호감 그 자체다. 
 
게다가 자신을 돕기 위해 온 수녀님을 희롱하기까지 한다.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가운데 한 TV 인터뷰는 가관이다. 자신이 인종차별주의자이고, 나치 신봉자라는 것을 마구잡이로 떠들어댄다. 이런 망나니 같은 인터뷰를 본 뒤, 수녀님조차 이런 자를 위해 뭘 하고 있는 거지, 라고 어이없어 할 정도다.

보통 이런 영화는 영화가 진행되면서 사형수를 이해하고 동정하고 용서하게 된다. 아니, 감독이 "그러셔야 합니다." 라고 은근히 강요한다. 어라, 근데 어찌된 영문인지, 이 놈을 알면 알수록, 사건을 자세히 알면 알수록, 있던 동정심도 사라질 판국이다. 영화가 한참 진행되고 나면, 사형제 폐지를 옹호했던 사람도 사형제를 찬성하게 생겼다.

그래도 혹시나 하게 된다. 이 놈이 천하에 못된 놈인 건 맞지만, '누명을 쓴 건 아닐까' 하는 생각. 이 부분에 있어서 매튜가 상당히 단호한 태도를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죽을 때 죽더라도 거짓말 탐지기는 한 번 해보고 싶다고 한다. 적어도 어머니에게는 자신이 살인범이 아니라는 걸 확인해 주고 싶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아니다. 그가 진범이다. 사형대에 올라가기 불과 몇 분전에 이르러서야 매튜는 헬렌 수녀에게 추악한 진실을 털어놓는다. 누명도 아니었던 것이다. 진짜 악랄한 놈 아닌가? 근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인종차별주의자, 나치 신봉자, 딱 보기에도 양아치, 끝까지 누명이라고 거짓말을 하던 이 놈인데.. 그가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순간 머리가 지끈지끈해진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여버린다. 도대체 왜? 인간이란 참으로 알 수 없는 존재다. 만약 신이 있다면, 신이 인간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어쩌면 이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끝까지 객관의 눈을 유지한다. 매튜가 자기 죄를 고백하고 뉘우친 뒤, 사형대에서 죽어갈 때도 함부로 그를 동정하지 못하게 한다. 그가 저지른 강간 살인의 잔혹한 모습을 의도적으로 강렬하게 보여준다. 벌거벗겨진 채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피해자들의 시체.. 그가 뉘우쳤으니 이제 그를 용서하자라는 말을 쉽게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게 이 영화의 최대 미덕이다. 그저 보여 주는 것. 관객을 설득하려 들지도, 가르치려 들지도 않는다. 쉽게 용서를 이야기하지 못하게 하고, 싸구려 동정을 경계한다. 동시에 쉽게 "저 범죄자를 죽여라", 라고도 말 못하게 한다. 이 영화는 관객에게 진지함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난 뒤에도 리뷰를 쓰고 난 뒤에도 머리가 지끈지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