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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소설

조지 오웰 <1984>

by R.H. 2017. 9. 5.






증오를 확산하라!



"2분간의 증오 프로그램이 특히 끔찍했던 이유는 참여하는 사람들이 마지못해 의무적으로 격렬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분위기상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는 데 있다. 30초면 모든 가식적인 행동들이 불필요하게 된다. 공포와 복수의 끔찍한 황홀경, 남을 죽이고 싶은 욕망, 큰 쇠망치로 누군가의 얼굴을 마구 때리고 싶은 충동 등이 행사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을 전류처럼 휘젓고 지나가게 된다."



<1984>는 일당독재 체제가 구사 가능한 모든 테크닉이 망라된 소설이다. 끝없는 전쟁으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감시와 고발로 불안을 확산시키며, 2분간의 증오 프로그램으로 서로에 대한 증오와 혐오를 확산시킨다. 2분간의 증오 프로그램에서 지목된 규탄의 대상은 골드스타인이라는 반란자인데, 살았는지 죽었는지, 아니.. 존재하기는 하는지 알 수 없는 애매한 존재다. 하지만 당은 끊임없이 이 인물에 대한 증오심을 부추긴다. 그런데 참 희한한 것이 골드스타인에 대한 증오는 어느새 다른 인물, 자기 옆에 있는 무고한 인물에 대한 증오로 손쉽게 전이된다.



"그는 고무 곤봉으로 그녀를 죽도록 때리고 싶었다. 그는 그녀를 벌거벗겨 말뚝에 묶어놓고 성 세바스찬처럼 화살로 마구 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는 그녀를 욕보이고 오르가슴의 순간에 그녀의 숨통을 끊어버리고 싶었다. 그 순간 그가 그녀를 왜 그토록 증오하는지 인식하게 되었다. 그녀는 젊고, 아름답고, 성 경험이 없어 그는 그녀와 잠자리를 같이하고 싶었지만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화가 난 것이다"



옆자리에 있는 저 젊은 여자를 때려죽이고 싶다. 그녀가 반란자여서도, 윈스턴을 무시해서도, 조롱해서도 아니다. 저 여자가 흉악한 일을 벌여서도 아니다. 윈스턴은 저 여자를 모른다. 그런데 증오 프로그램에 물들어버린 그는 알지도 못하는 저 여자를 혐오한다. 죽여버리고 싶다. 왜? 아름다우니까, 가질 수 없으니까.. 전체주의가 확산시키는 공포와 불신, 그리고 증오와 혐오에 우리는 얼마나 손쉽게 물들어버리는가..



역사를 왜곡하라!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하며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



오세아니아의 계층은 상위 1퍼센트의 내부당원과 상위 15퍼센트의 외부당원, 그리고 나머지 85퍼센트의 프롤로 구성되어 있다. 학자, 관료, 공무원 , 지식인, 화이트칼라로 구성된 외부당원은 신라 6두품과 비슷한 느낌이다. 우리의 주인공 윈스턴은 바로 지식인 계층에 해당하는 외부당원으로 기록국에서 일하는 공무원인데, 기록국이 하는 일은 과거 기록 중에 당의 입장을 곤란하게 하는 내용은 삭제, 왜곡, 파괴하는 것이다.


언어를 선점하라! 



그리고 기록국 옆에서는 신어를 만드는 일이 한창이다. 당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언어 즉, 신어는 언어를 단순화하는 데 초점이 맞춰있다. 시제를 통일하고, 문장을 단순화하고, 단어를 최소화 한다. 그들은 왜 이런 작업에 열을 올리는 것일까. 언어는 사고의 반영이다. 즉, 언어를 단순화하면, 사고 역시 단순해진다. 그들은 언어의 단순화를 통해 우매한 대중, 생각하지 않는 인간을 만들 수 있고, 국민을 정형화한 언어 속에 가둘 수 있다. 그야말로 단어의 프레임을 손쉽게 씌울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언어를 선점하고, 기록을 주도하며, 기억을 조작한다. 그들은 단순히 찍어내리는 힘, 물리적 힘 그 자체만이 아니라, 더 깊고 더 넓은 의미의 힘을 가지고 있다. 언어는 권력인 것이다.



이것이 과연 오세아니아라는 가상의 극단적인 전체주의 국가에서만 일어나는 일일까? 혐오를 확산하고, 기록(역사)을 왜곡하고, 저급하고 단순한 신조어를 만들어 프레임을 씌우는 일.. 이것은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고, 앞으로도 계속될 일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가장 먼저 그들에게서 빼앗아야 하는 것은 바로 언어다. 기억은 불완전하고, 언어는 한계가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최선의 무기는 기억과 언어, 그리고 기록이니까.. 그리고 그들이 퍼트리는 증오와 혐오에 동조해서도, 물들어서도 안된다. 



지식인, 엘리트 계층의 한계



윈스턴은 이것이 모두 거짓이라는 것을 안다. 일당독재 감시체제, 자식이 부모를 고발하고, 증오를 권장하는 이 사회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그는 남몰래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왜, 무엇 때문에, 일기를 쓰고 싶었을까. 무언가를 고발하기 위해? 선동하기 위해? 후세에 기록을 남겨주기 위해? 아니다. 그는 그저 쓰고 싶을 뿐이다. 기록하고자 하는 욕구, 그것은 지식인의 본능이다. 



"그는 어머니가 접시에 수프를 충분히 담지 않으면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고 어머니의 손에서 냄비와 국자를 빼앗으려고 했다. 뿐만 아니라 급기야 동생 접시에 있는 음식을 빼앗아 먹기에 이르렀다. 그는 자기 때문에 다른 두 식구가 굶어 죽을 지경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는 도리어 자신에게 그렇게 행동할 충분한 명분이 있다고 여겼다. 자신의 배에서 나는 꼬르륵 소리가 모든 것을 정당화한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윈스턴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육체의 욕망을 가지고 있다. 고통을 피하고 싶고, 배고픔을 면하고 싶은 바로 그 욕구. 윈스턴은 독재체제에 반항하는 인간이지만, 도덕적인 인간은 전혀 아니다. 윈스턴은 어린 시절, 수프를 더 먹기 위해 악을 악을 썼고, 자신의 여동생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배급된 초콜릿을 혼자 독식하겠다고 떼를 썼다. 초콜릿의 3분의 2를 받고도 동생이 가진 3분의 1의 초콜릿을 빼앗아 달아났다. 심지어 여동생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면서도 이런 비열한 행동을 했으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기까지 했다.



윈스턴은 빅브라더 독재체제를 전복시키는 지하 조직에 가입하면서는 혁명을 위해서라면 무고한 사람들이 죽고 다치는 것을 개의치 않고, 전염병을 사회에 퍼뜨리는 것도, 어린아이의 얼굴에 황산을 뿌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한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모든 수단을 가리지 않겠다는, 온갖 비도덕적인 행위도 서슴치 않겠다는 선언이다. 이런 식이라면, 무엇을 위한 전복이고, 무엇을 위한 저항이란 말일까. 빅브라더 독재체제의 잔인함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줄리아와의 관계에서 역시 윈스턴의 한계가 드러난다. 윈스턴은 39세의 중년 남성이다. 줄리아는 이제 갓 20살이 넘은 젊은 여성이다. 그런데 이들의 관계를 주도하는 것은 줄리아다. 줄리아가 먼저 윈스턴에게 접근하고 사랑을 고백한다. 성관계 역시 줄리아가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문제(?)가 있는 윈스턴을 리드한다. 젊은 여성과의 로맨스를 꿈꾸는 능구렁이 중년 남성의 욕망과, 성관계에서 경험이 많은 상대 여성이 자신을 리드해주길 바라는 미숙한 소년의 욕망이 뒤섞여 있는데, 이는 그가 몸은 성인의 욕망을 가졌지만, 그의 의지는 덜 발달한 미성년에 머무르고 있다는 의미다.



그렇다. 윈스턴은 전형적인 지식인이다. 정의를 바라는 욕구와 육체적 만족을 바라는 욕구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전형적인 지식인다. 몸은 성인이지만, 자기 주도적인 의지는 발달하지 못한 미성년이다. 옳고 그른 것이 무엇인지 머리로는 명확하게 알지만, 행동은 전혀 도덕적이지 않은 바로 그 지식인이다. 윈스턴의 실패, 윈스턴의 파멸은 어린 시절 여동생의 초콜릿을 빼앗아 달아나면서 결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프롤들에게 있었다. 윈스턴은 그것을 굳게 믿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이런 말은 그럴듯하게 들렸지만 실제로 이런 인간들을 거리에서 만나게 되면 그 말이 과연 맞는지 의구심을 품게 된다"



윈스턴은 틈만 나면 프롤, 즉 민중들만이 희망이라고 중얼거리지만, 실제로는 민중들을 믿지 않는다. 민중들이 희망이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몸으로 부딪히며 만나는 그들의 모습에서 의구심을 갖는다. 먹고 자고 싸고, 되는대로 사는 그들의 모습에서 어떤 에너지를 느끼면서도, 동시에 마음 속깊이에서는 무지렁이들에 대한 경멸이 숨어있는 것이다. 



소설의 결말에 대하여..



이 소설의 결론을 어떻게 봐야 할까.. 지독하게 비관적이고, 지독하게 패배주의적인 결말이다. 고문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하는 인간...자존심, 인격, 도덕, 신뢰 등 인간이라면 가져야 할 그 모든 것들이 육체적 고통을 피하고 싶다는 그 단 하나의 욕망 앞에서 산산이 부서져 버리는 결말이다. 바람직하지 않은 결말이다. 위험한 결말이다. 굴복과 체념의 결말이라니.. 



그런데 그렇지 않다. 이 소설의 주인공 윈스턴이 도덕적 인간이었던가? 실천적 인간이었던가? 불굴의 의지를 가진 인간이었던가? 아니다. 그는 비도덕적이고, 미숙하며, 이기적인 인간이었다. 머리와 행동 사이, 정신적 욕구와 육체적 욕구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인간이었다. 민중이 답이란 걸 알면서도, 민중의 삶 속으로 들어간 적도 없었고, 그럴 의지도 없었다. 도리어 민중의 삶을 얼핏 본 것만으로도 그들에게 회의를 가졌던 인간이다. 무엇보다 프롤들에 의한 그 어떤 것도 소설 속에서 시도된 적이 없다. 



윈스턴은 누굴 진실로 사랑해 본 적도 없다. 수프를 더 먹기 위해 엄마에게 악다구니를 쓰고, 초콜릿을 더 먹기 위해 여동생의 것을 빼앗았다. 자기 고통을 면하기 위해 자기 대신 줄리아를 갈기갈기 찢으라고 했던 인간이다. 이런 그가 인권을 평등을 자유를 정의를 외칠 자격이 있단 말인가.. 지식인 윈스턴에게 인권, 평등, 자유, 정의는 관념으로만 존재하는 거품 같은 단어들이다..



윈스턴으로 대변되는 이중적인 엘리트들에 의한 변화는 일어난 적도 없고, 일어났어도 역사에서 스쳐 지나가듯 나타난 짤막한 에피소드에 불과했다. 빅브라더식의 힘만이 아니라 오락가락하는 엘리트주의 역시 무너져야한다. 윈스턴이 푸념 조로 읊조리던 저 말.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프롤들에게 있었다" 이것은 진리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이것만이 진리다. 프롤이 기억할 때, 프롤이 언어를 주도할 때, 그리고 프롤이 표현할 때, 결국 이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