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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소설

오로네 드 발자크 <골짜기의 백합, 1836>

by R.H. 2017. 7. 1.




모르소프 백작은 자기연민과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몰락 귀족이다. 게다가 가진 재산도 없는 무능력자다. 대혁명 이후 긴긴 망명생활을 하면서도 다가올 시간을 대비하지 않은 그는 왕정이 복고되어 관직을 하사받고도, 정무감각 부족으로 고사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백작이라는 껍데기만 남은 이 집안을 일으켜 세우는 것은 그의 아내 모르소프 백작 부인(앙리에트)이다. 그녀는 가난한 남편 집안을 일으켜 세우고, 못난 남편을 사랑하는 전형적인 현모양처다. 



그런데 모르소프 백작은 이런 그녀를 고마워하지 않는다. 고마워하긴커녕 사사건건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으며 사람을 들들 볶는다. 그가 할 줄 아는 것은 훈장질뿐이다. 뭘 진짜로 가르쳐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누군가를 꾸짖음으로써 자신에게 권위가 생긴다고 생각하는 전형적인 가부장적 꼰대다. 펠릭스에게 주사위 놀이법을 가르쳐준다면서 오만 성깔을 부리고, 아들에게 승마를 가르친다면서 꾸짖는 즐거움을 탐닉한다. 이런 류의 인간에게 자기 부인은 세상 제일 만만하다. 그는 집안일 하나하나 시비를 걸고, 마차와 말, 하인들의 제복에 대해서도 웬종일 아내를 소환해서 들들 볶는다. 



우리의 주인공 펠릭스는 이런 모르소프 백작을 끔찍이 싫어한다. 당연하다. 모르소프 백작은 펠릭스가 사랑하는 여자의 남편이니까. 그래서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 가장 돋보이게 묘사된 인물이 바로 모르소프 백작이다. 이 소설의 반은 수구 꼴통 가부장적 위계만 붙들고 있는 이 모르소프 백작을 까기 위해 쓴 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여튼, 펠릭스는 모르소프 백작의 행위를 "처벌할 수 없는 느린 살인" 이라며 맹렬히 비난한다.



그런데 펠릭스와 모르소프 백작 부인과의 사랑은 정신적 사랑이다. 그녀는 펠릭스가 어렸을 때 받지 못했던 모성적 사랑을 주고, 출세를 위한 사교계에 입문시켜 주고, 유용한 처세술을 알려주었다. 모든 것을 주었던 것이다. 단, 육체만 빼고. 펠릭스 역시 백작 부인을 성녀로 여기고 거룩한 여인으로 생각한다. 감히 육체적 욕망을 그녀 앞에서 드러내는 짓은 하고 싶지 않다. 그리하여 그는 영국 귀족인 레이디 더들리를 만난다. 한마디로 레이디 더들리는 요부다. 앞에서는 온갖 예의범절과 냉정함을 보이지만, 침실에서는 교태와 열정으로 가득한 여인이다. 



헌데 시간이 좀 지나자 펠릭스는 더들리 부인을 성가셔한다. 육체적 욕망에 충실한 이 여인을 폄하하고, 그녀의 형식주의를 비아냥댄다. 그리고 일반화 한다. 그러니까, 성가시면서, 겉 다르고 속 다른 이 여자를 영국 전체로 생각한다. 즉, 이 여자의 단점을 곧 모든 영국인의 단점으로 뭉뚱그려버린다. 영국인, 섬나라 종특을 까기 위해 이 여자를 소설에 등장시킨 듯한 느낌마저 들 정도다. 좀 부당하다 싶을 정도로 까댄다. 여튼, 이런 펠릭스와 레이디 더들리의 연애 행각은 사교계를 떠들썩하게 한다. 이 요란한 연애가 당연히 백합처럼 순수한 모르소프 백작 부인의 귀에도 들어가고, 이 완전한 여인은 슬픔으로 병이나서 세상을 뜬다. 



"훌륭한 여성들은 고통 받고 병든 영혼들 곁에서 숭고한 역할을 맡아야한다. 상처를 치유하는 소녀, 아이를 용서하는 어머니의 역할이다"



그리고 거룩한 모르소프 백작 부인같은 모범적인 여성상을 저렇게 찬미하며 소설이 끝나려는 순간, 소설에서 간간이 언급되던 나탈리라는 여성이 펠릭스에게 보낸 편지가 짜잔하고 등장한다. 그런데 나탈리는 도대체 누규?? 펠리스가 사랑한 세 번째 여인이다. 그렇다. 이 기나긴 장광설은 펠릭스가 나탈리에게 보내는 편지다. 고백이다. 자기 과거 연애사를 구구절절 늘어놓은 것이다. 



나탈리는 편지에서 펠릭스를 한심스러워하며, 신랄하게 비난한다. 그 완벽한 여성인 모르소프 백작 부인을 슬픔으로 몰아넣어 죽게 한 것은 펠릭스 바로 당신이라고. 이보다 더 흉측한 일은 본 적이 없다고.. 그런데 감상적인 말로 교묘하게 자기포장하면서 자기는 죄없다 생각한다고.. 레이디 더들리에 대한 펠릭스의 악평 역시 미숙한 펠릭스가 받은 자존심의 상처를 어루만지기 위한 복수 행위에 불과하다고.. 그리고 세상 젤 불쌍한 인간은 바로 펠릭스 당신이 사랑할 네 번째 여자라고..여성을 성스러운 반열에 올려놓고, 남자를 보듬고 감싸고 안아주고 상처를 치유해주고, 모든 걸 용서해주는 말도 안되는 여성상을 만들어 놓은 펠릭스에게 "아니거든" 이라며, 마지막으로 카운터 펀치를 날린다. 



"우리 여성들은 당신이 생각하는 만큼 그리 바보가 아니랍니다. (중략) 여성들은 바위 위에 사랑의 꽃들을 심는 것도, 병든 가슴을 치유하기 위해 어루만져 주는 것도 즐기지 않습니다"



'나와 나의 사랑 모르소프 백작 부인이 세상 젤 불쌍하고 다른 사람들은 다 못돼 처먹었어', 라는 펠릭스에게 나탈리로 대변되는 독자는 니가 얼마나 이기적인 인간인지를, 단조롭고도 이성적인 어조로 일침을 날린 것이다. 1인칭 화자 펠릭스에게 마지막 순간 거울을 들이민 느낌이다. 



추가 : 이 소설이 1인칭 화자 시점으로 진행되었다는 걸 나탈리의 편지가 등장한 순간에야 깨달았다. 그렇다. 언제나 이야기는 한쪽 말만 들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연애소설인줄 알았는데, 마지막에 생각지도 못한 이런 반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