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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

열왕기하 3장~9장 : 정치적인 인간 엘리사

by R.H. 2018. 4. 10.


엘리사는 자신의 스승인 엘리야와는 성격이나 성향이 좀 다르다. 엘리야는 굉장히 직선적이고 강경하며, 굽힐 줄 모르는 사람이어서, 이스라엘 왕과의 관계가 극도로 나빴다. 그래서 엘리야는 오랜 기간 도망 다니며 고생 고생했고, 한 번 등장하면 왕을 향해 저주와 악담 수준의 예언을 퍼부었다. 엘리야가 기획한 대형 이벤트(바알 사제와의 대결)도 거대하고 화려하며 드라마틱하다. 



반면에 엘리사는 상대적으로 뭔가 오밀조밀한 느낌이다. 그래서 엘리사가 보여준 기적의 사건들은 엘리야의 그것보다 수적으로 훨씬 많이 기록되어 있지만, 엘리야만큼 임팩트있진 않다. 물길을 변경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끈 꾀돌이 전략은 규모가 큰 성과지만, 소금으로 물을 정화하고, 수프에 넣은 독풀을 중화한 것, 보리빵과 곡식 한 자루로 100명에게 먹인 일 같은 것은 '기적' 이라는 단어를 쓰기에는 너무 소소한 것들이다. 보리빵이 찹쌀떡만 한 것도 아니고, 유대인들이 먹는 큼직한 빵 덩어리를 생각해보면, 그거 20개로 100명이 나눠 먹는 게 별로 어려울 것도 없어 보일 뿐더러, 곡식도 한 자루나 있다고 하지 않았나. 말이 한 자루지, 이게 한 봉지 수준인지 한 가마 수준인지 알 길도 없고.. 여튼 자질구레한 기적이 많다. 게다가 물에 빠뜨린 도끼 찾은 것까지 기적 카테고리에 넣기는 좀 민망하지 않은가.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나를 데려가시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해주기를 바라느냐?"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스승님이 가지고 계신 능력을 제가 갑절로 받기를 바랍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열왕기하 2장 9절>



하지만 이것은 엘리사가 매우 박학다식한 사람이었다는 점, 그의 스승 엘리야를 뛰어넘는 지식의 소유자였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저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엘리사의 지식에 대한 욕심은 대단하다. 그리고 엘리사는 단순히 지식을 축적하고 연구하는 학자적 인간이 아니었다. 자신의 지식을 분해하고 버무리고 연결해서 이것을 전략적으로 사용할 줄 아는 정치적인 인간이었다. 



엘리사는 시리아 왕궁에 스파이를 심어두고 정보를 캐낼 수 있는 능력도 있었다.("이스라엘에는 엘리사라는 예언자가 있어서, 임금님께서 침실에서 은밀히 하시는 말씀까지도 다 알아서, 일일이 이스라엘 왕에게 알려 줍니다." -열하 6장 12절)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왕과도 사이가 심각하게 나쁘지 않았다. 엘리사가 본격적으로 정계에 등판한 것은 모압과의 전쟁 때이다. 이때, 이스라엘 왕은 사람을 보내 엘리사의 전략을 듣고 싶어하는데, 엘리사는 약간 비아냥거리긴 했지만, 이스라엘 왕을 도와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비아냥이다. 그러니까, 입을 삐죽삐죽 거리면서, 약간 튕기는 듯하면서, 왕과의 협력을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 뒤로는 이스라엘 왕에게 딱히 부정적인 말은 한 적이 없다. 그의 스승 엘리야처럼 예언을 빙자한 저주와 악담을 왕 면전에 대고 퍼붓는 장면도 열왕기에는 없다. 오히려 저렇게 스파이들을 통해 얻은 정보를 이스라엘 왕과 공유하고, 자신의 시종-요즘 식으로 말하면, 비서나 보좌관-을 통해서 왕과 자주 의견을 교환 한 듯하다. ("왕은 하나님의 사람의 시종인 게하시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열하 8장 4절)



자신의 스승인 엘리야와 극도로 사이가 나빴던 아합과 이세벨에 대한 악감정을 엘리사는 다 잊은 걸까? 그때 일은 그때 일이고, 이젠 새로운 협력의 시대를 만들어가는 걸까? 아니다. 엘리사는 예후라는 인간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만들어서 전임왕과 그 일족을 한큐에 몰살시켜 버린다. 그렇다면, 겉보기에 대체로 원만한 왕과 엘리사의 관계는 무엇이었을까? 군자의 복수는 10년이 걸려도 늦지 않는다 했으니.. 가장 확실한 기회를 얻을 때까지 인내하고 또 인내한 것일까? 아니면, 겉보기와 달리 그들의 관계는 곪아있던 것일까?



여튼, 엘리사로서는 자기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일을 단숨에 처리했다. 게다가 자신이 직접 기름을 부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제자를 예후에게 보내서 예후를 옹립하는데, 이때에 제자더러 기름 부어주고는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가라고 했다. 엘리사는 확실히 엘리야와는 결이 다른 인간이다. 선지자라기보다는 모사꾼에 가까운 인간이었다.



시리아 왕 벤하닷 역시 이런 식으로 처리(?)한다. 벤하닷이 병들자, 그는 자신의 부하 하사엘을 엘리사에게 파견한다. 엘리사는 엘리야처럼 죽은(혹을 죽을 병에 걸린) 사람을 살려내는 의술도 보유한 걸로 유명했다. 근데 엘리사는 자신을 방문한 하사엘의 눈을 민망할 정도로 빤히 쳐다보더니, 예언을 한다. 관상가여, 뭐여... 



"주님께서, 그대가 시리아 왕이 될 것을 나에게 계시하여 주셨소." <열하 8장 13절>



엘리사는 하사엘의 눈에서 욕망을 읽은 것이다. 그리고 그 욕망을 더욱 부추겨서 반역을 선동한 것이다. 하사엘은 벤하닷의 얼굴에 물을 적신 담요를 덮어서 질식시켜 죽이고, 자신이 왕이 된다. 이번에도 자기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왕, 그것도 남의 나라 왕을 갈아 치웠다. 정치력이 대단하심.



"엘리사가 죽을 병이 들자, 이스라엘 왕 여호아스가 그에게로 내려왔다. 그리고 그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다.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시여!" <열왕기하 13장 14절>



게다가 엘리사는 죽기 전까지 저렇게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엘리사는 자신과 대체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던 요담왕을 끌어내리고, 예후를 왕위로 올리고, 예후의 아들 때까지 살아서 활동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킹메이커가 언제 저렇게 끝까지 자신이 옹립한 왕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저렇게 극진한 대우를 받으며 생을 마감했던가.. 



엘리야가 요단강 건너편에서 하늘로 승천했다는 이야기는 겉으로는 화려한 이야기이지만, 어찌보면 쓸쓸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자기 집에서 편히 임종 한 것도 아니고, 심지어 그 시체를 찾지도 못한 이야기다.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춘 건지, 불 속으로 뛰어들어간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객사다. 강골의 삶을 살았던 사람의 최후답다. 반면에 꾀돌이 엘리사는 임팩트는 좀 덜할지라도 부러움을 받을 만한 삶이었던 듯. 인생은 엘리사처럼..